뺏긴 역사찾자

■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마도러스 2006. 6. 17. 14:32

 

 

■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북부여(北夫餘)(BC 239-BC 58) : 고조선(古朝鮮)의 국통을 계승한 ‘해모수(解慕漱)’가 나라를 세우고, 오가(五加)들에 의해 단군(檀君)의 권좌에 추대되었다.

동부여(東夫餘)(BC 86-AD 22) : 북부여의 4대왕 고우루가 죽자, 그의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왕위에 올랐으나, 골본부여의 고두막한(동명성왕)에게 쫓기어 동쪽 가섭원에 세운 나라 이다.

고구려(高句麗)(BC 58-AD 668) : 북부여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둘째 아들, 고진(高辰)의 3세손, 고주몽(高朱蒙)이 세운 나라이다.

백제(百帝)(BC 18-AD 660) :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비류 백제를 세우고,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 지역으로 내려와서 확립한 나라이다.

 

고조선 시대에서 열국시대로 접어 들었다. 해모수(解慕漱)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五加(오가)들에 의해 단군으로 추대되시어 북부여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북부여의 시조라 합니다. (BC 232년).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년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8년입니다. 북부여는 7대를 계승해 내려갑니다.

 

북부여 1대 해모수(解慕漱)

2대 모수리(慕漱離)

3대 고해사(高奚斯)

4대 고우루(高于婁)(혹은 해우루解于婁) : 고우루가 죽자, 고우루의 동생 해부루는 왕위에 올랐으나, 한나라의 침범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킨 고두막에게 쫓기어 가섭원으로 가서 나라를 열었는데, 동부여라고 합니다. 늙도록 아들이 없어 근심하다가 곤연(鯤淵)의 큰 돌 밑에서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 뒤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고에 따라 도읍을 동해에 가까운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습니다.

 

5대 고두막(高豆莫)으로 계승되는데, 이분이 바로 동명성왕(東明聖王)이시며 골본(졸본)사람 이십니다. 이 때부터 골본(졸본) 부여라고 합니다. (BC 108)년에 즉위하시고 명실상부하게 고조선 영토를 크게 회복하십니다.

6대 고무서(高無胥):

7대 고주몽(高朱蒙)으로 계승하는데

 

 

동부여의 해부루(解夫婁)가 승하하고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서 정분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유화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증손자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와 부모의 허락 없이 맺어짐을 들켜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 있다하므로,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습니다. 유화께서 남아(男兒)늘 낳아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입니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舒蘭)입니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습니다. 주몽예씨 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고 금와왕의 일곱 왕자 및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어머니 유화의 뜻을 따라 화를 피하여 예씨 부인과 정표를 남기고, 동남으로 도망하였다가 동부여에서 골본(졸본) 부여로 남하하게 된 것 입니다.

 

골본부여에는 통치권을 이어받은 스물아홉살의 과부인 소서노(召西奴) 왕녀가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소서노(召西奴)는 해부루의 서자의 아들인 우태(優台)의 부인이었고, 우태(優台)는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소서노(召西奴)는 과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서노(召西奴)에게는 우태(優台) 사이에 낳은 어린 아들 비류와 온조가 있었습니다.

 

BC 58년 골본부여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과부가 된 자신의 딸, 소서노(召西奴) 왕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고주몽은 왕위에 오르게 되고, 해모수 사당을 짓고 고구려(高句麗)의 국통을 확립합니다. 동부여에 있는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남겨두고 왔던 아들 유리(琉璃)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BC 37년 주몽은 성(姓)을 고(高)라 하였습니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았고, BC33년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골본(忽本)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는 것은, 한나라가 고구려의 후기 수도인 골본(忽本)을 포함한 고구려의 영역 일부를 점령하면서 다시는 고구려가 일어나 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기원하는 마음에서 고구려의 수도를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졸(卒)자를 사용하여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골본(忽本)으로 적혀 있습니다. 졸본(卒本)의 원래 명칭은 골본(忽本)입니다. 골본(忽本)은 수도라는 뜻이므로, 수도가 바뀌면 골본(졸본)이라 부른 곳의 위치도 바뀌었습니다. 즉 환단고기 북부여기나 고구려 본기에 골본(忽本)으로 적혀 있는 지점은 심양(沈陽)이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주몽이 임시 수도를 둔 곳으로 적혀 있는 졸본천(卒本川)은 비류강 상류이며, 그 뒤 유리(琉璃)가 고주몽을 찾아온 졸본(卒本)은 당시 고주몽 고구려의 수도인 북옥저(北沃沮)입니다.

 

 

한편, 전한서(前漢書) 등에는 고구려(高九黎)가 고구려(高句麗) 또는 구려(句麗)로 적혀 있는데, 고(高)자가 천제(天帝)를 뜻하고, 구려(九黎)가 하늘나라(九天)에서 내려온 무리(黎)를 뜻하자 천제를 뜻하는 고(高)자를 빼고 구려(九黎)를 같은 음의 구려(句麗)로 바꾸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동이는 동쪽의 활을 쏘는 어진 민족이란 뜻인데 동이는 구이족(구려족九黎族이나 동이족東夷族)중 하나였습니다.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던 민족을 한족들은 예로 부터 동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족은 자기네 역사는 부풀리고 타민족의 역사는 축소시킵니다. 동이를 어진민족에서 오랑케라고 고쳐 부르고 역사왜곡이 시작된 때가 한무제 때부터입니다. 우리는 한무제가 천하를 통일한 군주로 아는데 사실은 동북아시아의 맹주 북부여와의 전쟁에서 패전을 합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는데, 그건 당시 고조선의 국호가 북부여로 바뀌고 그 제후국인 번조선을 찬탈한 위만정권을 한무제가 복속시킨 것입니다. 그 여세로 북부여를 공격하지만 고두막한이라는 북부여의 영웅이 한무제의 침략을 막아 냅니다.  북부여 침략에 실패한 한무제가 그때부터 그 보복으로 역사왜곡을 하게됩니다. 한나라의 한사군에 저항에서 고구려가 힘을 키워 나라를 세운다고 하는데 고구려라는 나라는 원래 부족국가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고주몽이 동부여를 떠나면서 임신중인 동부여의 예씨 부인에게 자신의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하면서 떠난다. 주몽은 징표를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징표는 육각나무 밑의 육각돌 밑에 묻어 놓았으니, 이 징표를 가져오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해 주리라고 하였다. 이에 태어난 아들이 유리(琉璃)이다. 유리(琉璃)는 어머니인 예씨부인의 슬하에서 열심히 학문과 무예를 익히면서 성인이 되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온 산의 나무를 찾아 보았지만, 도저히 육각나무와 육각돌맹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지쳐서 마루에 누워서 보니 바로 자신의 집의 기둥이 육각기둥이고, 그 밑의 돌이 육각돌인 것을 알 게 되었다.그 밑의 땅을 파보니 부러진 칼 한자루가 나왔다. 유리(琉璃)는 이것을 들고, 고구려로 찾아간다. 주몽이 자신의 아들이면 징표를 내놓으라고 하자, 부러진 칼을 내 놓았고, 이것이 주몽이 가지고 있던 반쪽의 칼과 일치하자 자신의 후계자임을 선포한다.

 

이 당시 고구려에서 주몽을 도와서 나라 건국에 힘쓴 골본 부여의 여왕 "소서노(召西奴)"는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찾아온 고주몽의 아들 유리(琉璃)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목하자, 소외감을 느끼고, 전 남편의 아들 비류(沸流)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소서노(召西努)와 아들 비류(沸流)가 세운 나라가 백제(百帝)이다.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백제(百帝)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세운 나라이고,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 지역으로 내려와서 계승한 나라이다.

 

■ 백제(百濟. BC 18-AD 660)의 기원

 

백제의 기원은 역사책 마다 각각 틀리게 나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2명으로 적혀 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제(百濟)의 시조가 온조(溫祚) 1명으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구태(九台) 3명으로 적혀 있다.

 

이곳에서는 아직까지 역사학계의 일반으로 받아들이는 비류와 온조 백제설을 시작으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동명성왕이 세운 골본(忽本) 부여(夫餘)에 인물이 출중한 “소서노(召西奴)라는 여왕이 살고 있었다. 소서노(召西奴)는 동명성왕의 아들 “고무서 왕”의 딸이었고,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결혼하여 비류(沸流) 온조(溫祚)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남편이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여왕이면서 과부로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녀 앞에 고주몽이라는 젊은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고주몽은 겨우 신하 세명 끌고, 동부여(東夫餘)에서 이웃 나라로 도망쳐 온 주제에 자기는 북부여의 천제이신 해모수의 3세손 “고모수”와 만주의 군장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나신 귀하신 몸이라고 떠벌리며 백발백중 만주 벌판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려,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BC 58년 골본부여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과부가 된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소서노(召西奴)는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사별한 후, 주몽을 두 번째 남편으로 맞이 한 것이다. 소서노(召西奴)와 주몽은 세력을 키우고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바꾼 뒤, 일대의 부족들을 정복하며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는 토착 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주몽에게 힘을 집결시키는 킹 메이커(king maker)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전 남편(우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비류(沸流)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무렵, 동부여의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유리(琉璃)”라는 아이가 성장하여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찾아왔다. 그리고, 주몽은 바로 그 유리(琉璃)에게 태자의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고주몽은 고구려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입국(立國)과 성장을 도운 소서노(召西奴)를 왕비로 하였지만, 소서노(召西奴)의 큰 아들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전에 골본(忽本)에 있을 때 북부여(北夫餘)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 것이다.

 

소서노(召西奴)와 그녀의 아들 비류(沸流)는 동부여에서 찾아온 고주몽의 아들 유리(琉璃)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목하자, 소외감을 느꼈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맏이(伯)이고 또 고주몽의 입국(立國)을 도왔는데도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데 불만을 품었다. 마침 그 무렵, 고주몽이 죽게되는데, 고주몽이 죽은 바로 그해 BC 19년에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다. 이때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沸流)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고주몽 고구려 지역 대부분은 유리(琉璃)가 장악하였고, 비류(沸流)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溫祚)는 형인 비류(沸流)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한강(漢江)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조국(溫祚國)으로, 수도 명칭을 위례성(尉禮城)이라 칭하였다. 고대 시데에 ‘온(百)’은 단순히 100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이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므로, 온조(溫祚)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즉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도 같은 뜻이다. 그리고 위(尉)는 하늘에 있는 해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므로,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 무리가 살고 있는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온조는 해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尉)"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온조(溫祚)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溫祚)라 칭한 것은 형 비류(沸流)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온조국(溫祚國)은 BC 6년에 낙랑(樂浪)이 보낸 5무리의 기마부대(五虎)에 의해 위례성이 점령당하였다.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온조(溫祚)는 온조국(溫祚國)의 유민들을 데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빠진 온조(溫祚)는 한강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 받아 금마산(金馬山 홍성 금마)에서 마한(馬韓)의 후국(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다. 이 십제(十濟)는 10명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그 뒤 온조(溫祚)는 힘을 길러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후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비류 백제가 멸망하자, 다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帝)로 바꾸었다. 백제(百帝)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세운 나라이고,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지역으로 내려와서 계승한 나라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