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한국)

■ 김대중 대통령, 정보 고속도로 세계 최초 건설

마도러스 2021. 8. 19. 00:49

 

 

 김대중 대통령, 정보 고속도로 세계 최초 건설

 

 김대중을 경제적으로 평가한다면, 미국의 하버드대학 경제학 교과서로 쓰였던 대중 경제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이다. 그는 경제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 시절에 김영삼 정권의 무능에서 시작된 ‘IMF 경제 파탄 위기 라는 초유의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했고, 무역 적자 상태를 무역 흑자 상태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성공한 경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중이 정보통신 산업의 기초를 튼튼하게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글로벌화가 되면서 한국이 세계적인 디지털 선도 국가로 자리 메김하고, 정보통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의 삶까지도 모두 디지털 정보 사회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 모든 기초 인프라를 김대중 정부 시절에 만들어 놓았다.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평가한다면,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만들어내고 정착시킨 장본인이며, 민주화의 화신(化神) 같은 존재이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30년간을 투옥과 해외 망명 그리고 가택 연금과 사형 언도는 아마 민주화와 뗄 수 없는 인동초(忍冬草) 같은 삶이였다. 한 개인의 김대중이 아닌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 김대중은 민주화의 상징 있었으니 참으로 한국사회에서 성공한 정치인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만든 장본인이다.

 

 김대중을 문화적으로 평가한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세계적인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문화적으로 선도 국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다. 일본과의 문화개방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과의 문화 개방을 시도할 때에 그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였지만, 우리 문화가 분명 일본 문화 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혜안을 가지고 밀어 붙였다. 그 결과는 적중했다. 오늘날 한류가 일본을 넘어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류 문화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문화 산업 경쟁력이 소비자 심리를 자극하여 수출 주도형 문화 산업이 발전하였다. 그는 한국 문화를 진정 사랑했던 지도자였다.

 

 김대중은 최초로 북한을 방북했던 대통령이다. 그의 통일론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지표가 되었다. 김대중 한민족 통일 정책은 북한을 통일의 대화 테이블로 끌여들였다. 북한과의 상호 교류를 통한 햇볕 정책으로 인하여 북한에서 탈북자가 이어졌고, 지금도 북한 인민들의 자본주의화가 햇볕 정책을 통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햇볕 정책은 성공한 정책이며, 민족 통일의 기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소망인 남북 통일에 대하여 김대중 대통령 만큼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실행하였던 정부는 없었다.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의 가치 철학 중에서 아마도 행동하는 양심이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오늘날 주변을 돌아보면, 민주와 반민주 그리고 친일과 민족, 진보와 보수, 부패와 반부패 등으로 분열 대립되어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양심에 따라 행동 하는 자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대중 시절의 그의 행보가 더 크게 돋보이는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 사회에 가장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지도자이다. 그가 남긴 업적과 철학을 잘 이어받아서 정의로운 대한민국과 통일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한다.

 

 김대중은 한국 지방자치제 건설을 위하여 13일 단식하였고,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 불호령을 쳤던 의인(義人)이었다. 모진 군부독재의 암살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기개,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쯤은 초개와 같이 버릴 자세를 평생 간직하셨던 그 의지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모두가 김대중 대통령 존경하는 자세는 실로 놀라웠다. 21세기에 한국이 IT선진국으로 세계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초반에 미국도 망설이던 Information Highway를 세계 최초로 전국적으로 깔았고, 미래 산업에 적극적으로 집중 투자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당시 세계 최초로 디지털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전자 정부를 건설하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는 일본을 추월하는 대한민국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김대중(DJ) 대통령 서거 12주기인 2021 08 18을 맞아 더불어민주당 대권주자들은 일제히 DJ 정신을 기리며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2021 08 1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거인의 삶을 따라 멈춤 없이 전진하겠다. 김대중 대통령님께서는 5번의 죽을 고비 55번의 가택연금, 6년간의 수형생활, 777일의 해외망명  모진 탄압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지켜냈다. 그렇게 불의와 역경에 굴복하지 않았던 김대중 정신이야말로 그 분께서 역사에 남긴 거대한 위업이다 라고 말했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묘소를 찾아 참배한 후, 기자들과 만나서 지도자는 그때의 지도자, 시대의 지도자, 역사의 지도자 세 종류가 있는데, 김대중은 역사의 지도자이다. 우리 시대 김대중 대통령과 동시대 사람들 그 시대를 함께 같이 산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그분의 꿈과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감사하다. 지금도 많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DJ는 하나의 모델이며, 그런 모델을 가진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것이다 라고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제가 코로나19 손실보상법 입법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김대중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에, 제가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민기초생활법을 만들었다. 지금 21년째인데, 이것이 대한민국 복지의 효시이고, 그 부분에서 자부심을 가진다 라고 말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은 제가 김대중 대통령님을 처음 뵈었을 때, 앨빈 토플러의 3의 물결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으시면서 역사 발전의 경로와 민족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해주었다. 제가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받아서 다음 5년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 라고 말했다.  박용진 의원은 중도 개혁 노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책을 계속 펼쳐나가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이다. 유능한 진보의 길로 가며, DJ 정신을 이어가겠다 라고 밝혔다.

 

 

■ 김대중, 초강력 정보화 산업 국가의 토대 마련

 

● 정보화 시대국가 지도자의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이유

 

★ 2001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에게 거액의 비싼 돈을 주고한국의 미래 산업 개발 보고서를 요청했다그리고2001년 06월 30 도착한 110 페이지 분량의 위기를 넘어서, 21세기 한국 비전’ 이라는 보고서를 토대로 정보화 통신 기술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미래 한국의 장기적인 먹거리로 정보통신 IT 강국을 선택한 것이다당시는 IMF 금융 위기 상태라서 국가적으로 상상도 못할 만큼 어려움에 직면했던 시기이다. 2001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오찬을 하며 의견을 나눴다그는 2001년 한국 방문 당시 한국의 15년 후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냈다그의 보고서에는 한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다저임금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종속국가로 남을 것인가아니면경쟁력을 확보하고 세계 경제에서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는 선도국으로 남을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그는 한국이 일본이 앞서 겪은 잃어버린 10” 실수를 답습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며, “인터넷과 새로운 통신 서비스의 공공 활용을 확산시키는 것이 국익을 창출하는 길이다고 조언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의 조언 대로 실천했다★ 또한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강경한 전쟁광이었던 미국 행정부를 설득했고남한 단독으로 남한 홀로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진행했다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남북 간 화해 협력과 IT 교류 협력의 물꼬를 텄다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백범 김구(金九선생의 문화 강국의 꿈한류 문화K-POP의 태동바이오 산업 육성 등의 미래 선도 산업의 기초 초석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미리 닦아 놓았다미래 산업 육성의 발목을 잡을지계속 앞으로 나아갈지이제그 다음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고난과 인내극복의 연속인 굴곡의 대하 드라마였다대권 4(四修끝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그는 지식 정보 강국 구현에 매진했고정보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그는 1982년 앨빈 토플러의 3의 물결을 읽었고, “만일국가를 경영하게 되면지식 정보 강국을 만들겠다!” 라고 다짐했다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산업 혁명 시대에 근대화 지체로 100년 동안 고생을 했다정보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산업화는 늦었지만정보화 산업은 미리 앞서 나가자!” 라고 강조했다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IT와 관련해 정보 강국의 토대를 마련하자!” 라고 선언했다김대중 대통령은 세계는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 정보화 사회로 나가고 있다자라나는 세대가 지식 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또한김대중 대통령은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이다벤처기업을 적극 육성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 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라고 밝혔다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곧바로 범국민 정보화 운동을 전개했다. ‘사이버코리아21’ 운동을 시작으로 e코리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그는 집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했다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07월 24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벤처기업 ()비트컴퓨터를 방문했다대통령 취임 후 첫 기업 방문이었다그는 이날 "21세기는 각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벤처기업과 전문 중소기업 발전이 더욱 중요하다정부는 이를 위해 벤처기업의 창업에서 성장까지 과정을 적극 지원해 육성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IMF 금융 위기’ 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도전정신창의력을 내세운 젊은이들이 벤처 기업에 도전해서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22일 각 부처 장관들에게 앞으로 장관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가 인터넷과 전자 우편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특히인터넷을 통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정부 정책을 알리는 양방향 소통을 통해 전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정부가 앞장 서야 한다” 라고 지시했다. 2001년 02월 25일 정부중앙청사에서 과천청사를 연결하여 사상 첫 영상 국무회의를 열었다국무위원들이 정보화에 대한 자극을 주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 김대중 대통령은 세게 최초로 전자정부 시스템을 본격 개발 추진했다. 2001년 01월 29일 민관합동의 전자정부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2002년 11월 13일 전자정부를 완성하고청와대에서 전자정부 기반 완성 보고 대회를 갖었다전자정부는 행정 혁신의 획기적 수단이었다김대중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전자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근대화 이후한국이 일본을 앞지른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의 IT 산업이었다그러나이명박 대통령 정부(2008-2013)가 정보통신부를 없애자김대중 대통령은 탄식했다.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정부 부처를 폐지하다니그 사고가 의심스럽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추진한 ‘정보 뉴딜 정책’은 경제 위기를 정부 주도의 정보 통신 분야 육성을 통해 정면 돌파한 사례로 꼽힌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발표한 '사이버 코리아 21'은 향후 4년간 118조원의 생산 유발 효과를 일으켰고, 2002년까지 1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결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유엔(UN)이 발표하는 전자 정부 지수는 2002년 15위에서 2011년 1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세계 경제 포럼(WEF)의 네트워크 준비 지수는 2002년 20위에서 2011년 12위로 상승했다.

 

★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11월 06일 초고속인터넷 1,000만 돌파 기념식을 거행했다이날 치사를 통해 이제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5천년 역사에 처음 있는 세계 일류 국가 도약의 기회입니다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토대로 계속 노력해 나가면 가까운 장래에 세계 일류 국가의 꿈을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우리 모두 자신감을 가집시다세계 최선두의 지식경제 강국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갑시다!” 라고 당부했다정보화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1000만 정보화 교육을 함께 실시했다김대중 대통령은 전남 신안 하의도 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빗길을 하나씩 건넜다그리고, 2009년 08월 17일 오후 1시 43분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향년 85그의 삶은 뜨겁게 타오르는 횃불과 같았다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의 무역 수지를 살펴보면, 박정희 233억 달러 적자, 전두환 8억 달러 흑자, 노태우 132억 달러 적자, 김영삼 366억 달러 적자, 김대중 846억 달러 흑자 등이다. 김대중(1998~2003) 대통령은 김영삼(1993-1998) 정부로부터 1997년 IMF 경제 파탄 상황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5년 동안에 846억 달러라는 최고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으니, 경제 운영을 매우 잘 한 것으로 평가된다.

 

■ 부품 소재 산업 육성을 위해 특별 조치법을 마련한 김대중 대통령

 

 2001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시 '부품소재 전문기업 육성 등에 관한 특별 조치법' 제정과 함께 2010년까지 모두 2조원을 투입한 결과, 2010년 부품 소재 수출은 2001년 대비 3.7배 증가한 2천 290억 달러로 집계됐다. 2010년 우리나라의 부품 소재 세계 시장 점유율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제치고 2001년 세계 10위에서 2009년 세계 6위(점유율 4.6%)로 상승했다. 2001년 ‘부품 소재 개발 정부 지원법’이라는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완제품 중심의 생산 체제에서 부품과 소재 개발에 역점하고, 정부가 이의 산업화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01월 01일 신년사에서 2002년을 국운(國運융성의 해로 만들자!” 라고 강조한 후, ‘재료 연구소를 경남 창원에 확대 운영하여 부품 소재 기술 관련 분야의 연구 기술 개발 업무를 적극 지원했다그 후, 한국의 수출 상품 내용이 완제품 중심에서 부품 소재 중심으로 무역 구조가 건실화 되었다. 2005년을 정점으로 부품 소재 산업이 전체 산업의 무역 수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커졌다. 2007년에는 364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고, 전체 산업 흑자 143억 달러의 2.5배 수준에 달해 수출 산업의 주력으로 부상했다. 그 후, 부품 강국인 일본(日本) 회사가 한국 전자 부품 기술을 배우러 오고 있다. 1990년대까지 전자 부품에 관한 한 일본(日本)은 자타 공인 계 넘버(number) 원(one)이었다. 이런 일본 회사들이 한국(韓國)의 핵심 부품 기술을 라이선싱하거나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 한국 부품 업체의 기술 경쟁력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라보게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세계 정상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도 한국산 부품이 없으면, 고급형 전기차 제조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이다.

 

★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출한 위기를 넘어서, 21세기 한국 비전’ 이라는 보고서를 통해서 한국이 미래의 선도국가가 되기 위한 여러 제언을 했는데지금 보아도 새삼 그의 혜안에 놀랄만한 내용이 많다먼저 그는 생명공학과 정보통신 기술은 경제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두 분야의 강력한 힘은 서로 융합되어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내다봤다그리고이러한 융합이 건강서비스자가진단첨단 의료기술 분야 등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했다정보통신 기술분야(IT)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가진 우리의 기술력과 인프라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위기에서 확인된 바이오 분야의 경쟁력이 K-방역의 성과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요인들임을 고려한다면그의 예측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앨빈 토플러는 수출의 중심이 기존의 제조업에서 영화나 TV 프로그램제약 연구방송 경영 등 무형 자산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역설했다. 2020년 방탄 소년단이(BTS) 빌보드 차트 수위를 차지하고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 4개 부분을 수상했다그리고넷플릭스에 선보인 한국의 드라마들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제안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한국은 미국일본유럽을 목표로 삼아 단숨에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변신했지만그 이후에는 따를만한 검증된 모형이 없을 것이고따라서 그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면서 부()의 미래는 지식재산에서 창출될 것이므로 지식재산의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이와 관련된 국제협상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최근 몇 년 동안, 우리의 지식재산 보호 수준이 획기적으로 강화되고 있다지식재산의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받고 보호받아야만창의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책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고의적 특허 침해에 대한 3배 배상을 적용한 것이나특허권자의 생산능력을 초과한 부분의 침해에도 배상 원칙을 확립한 것 등은 정당한 보호를 통해 지식재산이 제값으로 거래되고 투자되는 지식재산 금융투자 시장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또한, 2020년 한국은 세계 5대 특허청 회의의 회원국으로 건강한 글로벌 지식재산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특허권자의 보호와 글로벌 리더십토플러가 지식재산에 대해 강조한 내용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한국이 미래를 선도할 것이라 했다모든 나라에 위기일 수밖에 없는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의 가능성과 기회를 확인했고우리가 미래를 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품게 됐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고상상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그는 남겼다미래를 상상하는 힘은 결국 지식재산이라는 권리로 체화되기 마련이다지식재산을 더욱 각별하게 인식해야 할 이유이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1982년 그의 저서 3의 물결에서 컴퓨터에 의한 정보화 시대를 예견하면서 세계 최고의 미래학자로 인정받았다그는 이 책에서 미래사회가 정보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1의 물결인 농업혁명은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됐지만, ‘2의 물결인 산업혁명은 300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3의 물결인 정보화 혁명은 20-30년에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이 때처음으로 재택 근무전자 정보화 가정 등의 용어가 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