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야화

■ 물취이모(勿取以貌), 사랑방 야화(野話) 이야기

마도러스 2021. 3. 10. 02:58

■ 물취이모(勿取以貌), 사랑방 야화(野話) 이야기

 

 옛날, 고을의 원님이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살피기 위해 나무꾼으로 변장(變裝)을 하고,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피고 있었다.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먹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부잣집이 근처에 있었다. 원님은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 부잣집에서 먹을 것도 좀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기와집 대문을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하인(下人)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오?” "내 지나가는 나무꾼인데, 목이 말라서 그러니, 시원한 냉수 한 사발 좀 얻어 마실 수 있겠소?"

 

 하인은 나무꾼 차림의 원님을 아래 위로 훑어 보더니, “나무꾼 주제에 무슨 양반 말투를...기다려 보시오!”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 영감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하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영감이 말했다. “나무꾼님이 목이 마르시다는데, 바가지로 퍼다 드리거라.” 하면서 하인에게 눈을 찡긋하였다. 그러자, 하인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더니, 이윽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나왔다.

 

 원님이 고맙소.”하고 손을 내밀자, 하인이 냅다 물을 원님 얼굴에게 끼얹었다. “아니, 이게 무슨 행패요?” 그러자, 안에서 주인 영감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직 갈증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구나! 한 바가지 더 퍼서 안겨드리거라!” 원님이 어찌하는가 보려고 가지 않고 계속 서 있으니, 하인이 바가지에다 물을 퍼와서는 원님에게 또 끼얹었다. “내 보자보자 하니, 해도해도 너무 하는구만! 부잣집의 인심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이오?”

 

 그러자, 주인 영감이 뛰쳐나와서 말했다. “이놈아, 나무꾼이면, 나무꾼답게 머리를 조아리고, 물을 구걸해도 줄까 말까 한데, 어디 와서 건방지게 양반 말투를 해가며, 머리를 꼿꼿이 들고, 물을 달라고 하느냐? 어서 썩 물러가거라!”

 

 봉변을 당하고, 고을 동헌(東軒)으로 돌아온 원님은 관복(官服)으로 갈아입고, 다시 부잣집으로 갔다. 원님을 보자, 주인 영감은 버선발로 뛰어 와 원님을 맞아 안으로 모셔 들였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시켜 진수성찬(珍羞盛饌)을 차려 내오게 하였다. 이윽고, 상이 차려져 나오자, 원님은 음식과 술을 옷에다가 들이부었다. 이 기괴한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 영감이 당황한 기색으로 원님에게 물었다. “차린 상이 초라하였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이 다시 준비하여 내오겠습니다.”

 

 그러자, 원님이 말했다. “이 상의 음식과 술은 사람을 보고 차린 것이 아니라, 내 옷을 보고 차린 것이니, 마땅히 옷이 먹어야 하지 않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사옵니다.” “사람은 다 같이 귀하거늘, 나무꾼 옷을 입었다고 천한 대접을 하고, 관복(官服)을 입었다고 귀한 대접을 하는 것은 무슨 도리이냐?” 그러자, 주인 영감이 원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물취이모(勿取以貌)! “외모(外貌)로써 사람을 취()하지 말라!” 라는 뜻이다.

 

● '물취이모(勿取以貌)' 야화(野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하인(下人)의 입장은 참으로 처량하다. 주인님이 시킨 대로 불미(不美)스런 짓을 범행하는 공범(共犯)이 되어버렸다. 조선(朝鮮) 시대에는 신분 제도가 있었고, 하인(下人)들의 인권 수준은 거의 노예 수준이었다. 그들의 삶과 인권은 정상적으로 취급해 주지 않았다.

 

■ 1950년 한국 전쟁과 노비 신분 해방

 

역사학자들은 한국에서 신분제가 완전히 사라진 시기를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보고 있다. 1950년 6.25 전란(戰亂중에 다들 피난 가고 난리였다양반양민노비 전부 피난 갔다그리고전쟁 끝나고고향에 돌아왔는데노비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신분제 자체가 실질적으로 종식되었다. 최초의 신분제 폐지는 1894년 동학(東學혁명을 통해 이뤄졌다. 1894년 갑오 개혁 이후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일반 사회와 사람들의 인식까지 바로 바뀌진 않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이러한 신분제를 통치에 이용했다그 시절 양반들 중에는 노비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경우가 많았다형평 운동이 괜히 일어났던 것이 아니다어차피 노비들은 돈이 없으니 갈 곳도 없었다그 당시에 대부분은 갈 길이 없기 때문에 계속 양반들의 머슴살이로 많이 남아 있었다마을의 폐쇄성 때문에 신분제 폐지는 명목에 불과했다배우지도 못하고 조상 대대로 노비로 살던 사람들이 국가에서 '이제 노비 없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 리가 전혀 없었다.

 

신분제 잔재가 아예 송두리째 싹 날아가는 것은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신분을 해방해 놓아도 어차피 약자의 인생은 힘든 경제 상황의 연속이었다미국 흑인도 노예 해방해도 당장 나아지지 않았고지금까지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신분제 폐지했다고 무슨 세상이 확 변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법제가 바뀌었을 뿐이다현장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심했고양반들 보다는 오히려 일반 양민들이 분노했다고 한다자신들이 갑자기 천민들과 같아졌다는 느낌 때문이다땅 없이 소작농으로 사는 양민의 경우법적으로는 양인이어도 부잣집 노비 보다 못한 처지였다양반들은 여전히 돈이 많았고실질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이 매우 막강했다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을 건드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신분은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사회적 인식은 여전했고무엇보다 노비였던 사람들 역시 경제적으로 양반 지주들에게 종속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특별히 크게 성공하거나 재산을 축적한 노비 출신이 아닌 이상재산을 가진 양반 지주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그 잔재는 일제(日帝시대 때까지 계속 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여전히 양반 지주 밑에서 종속 상태에 놓인 노비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그 후, 1950년 6.25 한국 전쟁으로 터지면서 한반도 전체가 뒤엎어졌다그러자그토록 뿌리 깊었던 신분 제도의 잔재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1950년 6.25 전란(戰亂중에 다들 피난 가고 난리였다양반노비 전부 피난 갔다피난 길에서 본인의 출신은 이제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그리고전쟁 끝나고고향에 돌아왔는데노비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노비들은 피난 길에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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