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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가짜 편지, 감동 확산

마도러스 2020. 10. 26. 21:25

■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가짜 편지, 감동 확산

 

●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마지막 편지라는 제목의 가짜 편지 유포

 

★ 나의 편지를 읽는 아직은 건강한 그대들에게!”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 검진을 받아보고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괴로운 일 있어도 훌훌 털어버리는 법을 배우며양보하고 베푸는 삶도 나쁘지 않으니 그리 한번 살아보게나돈과 권력이 있다 해도 교만하지 말고부유하진 못해도 사소한 것에 만족을 알며피로하지 않아도 휴식할 줄 알며아무리 바빠도 움직이고또 운동하게나

 

3천원짜리 옷 가치는 영수증이 증명해 주고, 3천만원짜리 자가용은 수표가 증명해 주고, 5억짜리 집은 집문서가 증명해 주는데사람의 가치는 무엇이 증명해 주는지 알고 있는가바로건강한 몸이라네건강에 들인 돈은 계산기로 두드리지 말게나건강할 때에 있는 돈을 자산이라고 부르지만아픈 뒤에 그대가 쥐고 있는 돈은 그저 유산일뿐이라네!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차를 몰아줄 기사는 얼마든지 있고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돈을 벌어줄 사람도 역시 있을 것이오하지만당신의 몸을 대신해 아파줄 사람은 결코 없을 테니물건을 잃어버리면 다시 찾거나 사면 되지만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은 하나뿐인 생명이라오내가 여기까지 와보니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한한 재물의 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다네내가 죽으면나의 호화로운 별장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살게 되겠지내가 죽으면나의 고급스런 차 열쇠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게 되겠지내가 한 때에 당연한 것으로 알고 누렸던 많은 것들권력직위 이제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라네!

 

그러니전반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아너무 황망히 살지들 말고후반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아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행복한 만년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사랑해보시게나전반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나는 후반전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패배로 마무리 짓지만그래도 이 편지를 그대들에게 전할 수 있음에 따뜻한 기쁨을 느낀다네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그대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잘 돌보며 살아가기를 힘없는 나는 이제 마음으로나마 그대들의 행운을 빌어주겠네! (글 작가 미상)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남겼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글이 인터넷에서 급속히 확산한 가운데 삼성 전자가 가짜라고 부인했다. 2020년 10월 26일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이건희 회장이 남긴 마지막 편지라는 제목의 글이 유포됐다글을 쓴 이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이건희 회장이 운명을 달리했는데남긴 편지가 감동이라며마치 고인이 남긴 글인 것처럼 소개했다편지 글의 진위와 관련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가짜라고 일축했다이 글은 1년 전에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 오르내리며가짜로 판명됐던 글이다한편이건희 회장은 2020년 10월 25일 새벽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이재용 부회장 등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2014년 05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고, 6년 5개월간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그가 했다는 ’ 또는 은 어떤 형태로도 단 한 차례도 전해진 적이 없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20년 10월 25일 초일류’ 삼성을 남기고 떠났다.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키워 낸 삼성 그룹 총수였다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 창업자 고(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선친이 물려준 그룹을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키웠다삼성 회장으로 취임한 1987년 9조 9000억원이던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그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던 2014년 338조 6000억원으로 34배 늘어났다삼성그룹의 약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이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핵심 동력이 됐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버려라!' 결국, ‘가족에 매몰된 한계가 삼성의 한계이자 우리 시대의 한계 라고 함세웅 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말했다.

 

★ 이건희 회장은 정경(政經유착노동자 탄압경영권 편법 승계불법 비자금 조성무노조 경영황제 경영이라는 초법적 경영 등으로 대한민국 사회에 어두운 역사를 남겼다이건희 회장은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 당시 대검 중앙 수사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8년에는 김용철 변호사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한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 조준웅 특별 검사팀의 수사를 받아야 했다특검은 경영권 편법 승계에 이용된 에버랜드 전환 사채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 사채 저가 발행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이 회장을 불구속 기소했다이건희 회장은 기소 직후인 2008년 04월 전략 기획실 해체지배 구조 개선 방안 등이 포함된 경영 쇄신안을 내놓고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재판 결과 에버랜드 전환 사채 헐값 발행 관련 혐의엔 무죄가 선고됐으나 나머지는 유죄가 인정되어 2009년 08월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5벌금 1100억원이 확정됐다하지만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인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재계와 체육계 등의 건의에 힘입어 유죄 확정 4개월 만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단독 사면을 받았다이건희 회장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2010년 03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2014년 05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 이건희 회장의 외로운 유년 시절과 경영 승계 과정 이건희 회장은 1942년 01월 09일 대구에서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과 어머니 박두을씨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3남 5녀 가운데 7번째이다위로 4명 누나와 2명 형이 있었다그는 태어나자마자 가족과 떨어져 의령 할머니집으로 보내졌다. 3살 무렵 대구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살게 됐지만나이 차가 많은 형제들과 살갑지 못했다고 한다. 5살 무렵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당시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쉐보레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이병철 회장은 어린 아들을 매일 그 차로 혜화 초등학교에 통학시켰다유난히 자동차를 좋아했던 이건희 회장과 자동차의 첫 번째 인연이다한국전쟁이 끝난 뒤이병철 회장은 12살이 된 그를 일본으로 유학보냈다유학은 또다른 외로움의 시작이었다거의 매일 영화관을 찾으며 유학 3년간 1000여편의 영화를 봤다그의 영화와 음악에 대한 사랑은 이 때 싹텄다귀국해 서울대 사범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서 2년간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다그는 1982년부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이 되면서 물러나는 1997년까지 대한 레슬링 협회 회장을 맡았다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1961년 2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이어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은 뒤한국으로 돌아왔다이건희 회장은 1967년 삼성 소유의 동양 방송 사장과 중앙 일보 회장 등을 지낸 홍진기씨의 맏딸 홍라희씨(전 리움 미술관장)와 결혼했다그리고,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로 첫 공식 직함을 얻었다이병철 회장의 후계자는 장남 이맹희씨가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1966년 사카린 밀수 사태와 관련해 연루 의혹을 받던 이맹희씨가 후계 경쟁에서 탈락했다. 1979년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공식 후계자로 공표했고이건희 회장은 9년간 부회장 직함으로 경영 수업을 받았다. 1987년 11월 20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공식 취임했다이후 5년간 그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 글로벌 삼성전자 신화의 시작반도체 이건희 회장은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등이 핵심사업이던 이병철 회장 시절의 삼성을 전자 및 금융 계열로 재편했다. 1974년 경영난으로 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한 것이 계기이다국내외에서 기술도자본도시장도 없는 한국에 반도체는 어불성설이라는 ‘3불가론이 팽배했지만, “언제까지나 기술 식민지로 살 수는 없다” 라는 생각 때문에 반도체의 가능성을 봤다결국회사 돈이 아닌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절반을 인수했다현실의 벽은 높았다한국 반도체의 기술 수준은 형편 없었고상황은 악화됐다부회장 시절 거의 매주 서울과 일본미국 실리콘밸리를 오가며전문가들에게 매달렸다반도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감으로 이병철 회장을 끈질기게 설득했다이병철 회장은 1982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4년 뒤인 1986년 7월 삼성전자가 1메가 D램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삼성 반도체 신화의 출발점이었다이건희 회장은 일본 업체들이 반도체 투자에 주춤한 틈을 타 투자를 늘렸다선두주자들과 반대로 불황에 투자를 늘리라는 그의 지시는 고비마다 주효했다. 1992년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D램 시장에서 1위에 올랐고그 자리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 마누라자식 빼고모두 바꿔라!” 신경영 선언 : 1993년 0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이건희 회장과 임직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삼성전자 세탁기 조립 과정을 담은 영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영상에는 크기가 맞지 않는 불량 뚜껑을 직원들이 칼로 깎아내는 장면이 담겨있었다취임 6년 51세 젊은 회장의 격분이 서울로 전달됐다임원 200여명이 허겁지겁 프랑크푸르트로 집결했다호텔 회의장에 모인 임직원을 향해 불호령이 떨어졌다삼성을 글로벌 일류 반열로 끌어올린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1997년 터진 외환위기는 삼성에게도 큰 위기였다삼성그룹은 1998년 구조 조정이 시작됐다구조 조정이 끝날 무렵삼성그룹 계열사는 65개에서 45개로 줄었다삼성전자 3만명을 포함, 5만명에 달하는 임직원이 그룹을 떠나야 했다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에서도 손을 떼야 했다특히 심혈을 기울인 삼성 자동차의 실패는 뼈 아팠다. 1998년 SM5 첫 제품이 출시됐지만삼성 자동차는 4조원 부채를 남긴 채법정 관리에 들어갔다그룹의 운명을 걸고 벌인 전환기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디지털이었다. 1990년대 휴대전화 애니콜’ 국내에서 성공 신화를 쓴 삼성전자는 2010년 05월 첫 스마트폰 갤럭시S를 출시했고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1위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