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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충격! 기독교가 곧 사라진다

마도러스 2015. 5. 26. 16:58

 

교황청 충격! 기독교가 곧 사라진다

 

★ 성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표절 제작되었다.

 

31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기독교(基督敎)가 로마 국교로 되었다. 그 후, 325년, 1차 니케아 종교회의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관아래 소집되었다. 325년, 종교회의에 의해 지금의 기독교 성경(聖經)이 완결지어 졌다.

 

성경(聖經)의 내용들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고대 이집트(Egypt). 고대 희랍(Greece). 가나안. 시리아 등의 신화(神話)들 중에서 모방  표절해 왔다. 예수(Jesus)의 신분이 신격화(神格化) 및 우상화(偶像化) 되었다.

 

325년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가 성경을 쓰라고 지시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성경(聖經)의 많은 부분이 당대의 구미에 맞게 둔갑을 했다. 325년의 종교회의에서 발탁된 여러 가지 자료들 중에서 그들의 목적에 적합하지 않는 45권의 책들은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될까 두려워 아예 없애 버렸다.

 

■ 성경이 고대 수메르 문명을 베낀 것이 사실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중 가장 그 기원이 오래된 곳은 이라크의 유프라테스(Euphrates)강과 티그리스(Tigris)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수메르(Sumer) 문명이 꽃을 피웠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설형 문자들을 발견하고 판독해 가면서 비로소 기독교(Christianity)의 성경이 고대 수메르 문명을 베꼈다는 사실과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기독교의 근간을 뿌리채로 뒤흔드는 역사적 발굴

 

 

고대 수메르(Sumer)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기독교(Christianity)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 시대 보다 수세기 앞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Israel)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메르(Sumer)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까지 올라가며, 이로써 성서 고고학이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성서에 의하면, 아브라함(Abraham)은 수메르(Sumer)의 중요한 종교 도시인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다고 전하는데, 본디 우르 사람이었던 그가 수메르(Sumer) 문명아래서 60여년을 살다가 가나안 땅으로 가서 살적에 어느 나라의 말을 사용했고, 아브라함(Abraham)이 썼던 문자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명해진다.

 

■ 수메르 문자를 해독하면서 성경학자들은 당혹해 했다

 

고대 수메르(Sumer) 문명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판독해나가는 과정에서 기독교(Christianity)의 성경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창조 이야기, 에덴 동산 설화, 노아 홍수 이야기, 욥기, 아가서, 바벨탑 사건 등등 수많은 내용들이 수메르(Sumer)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졌다. 

 

성서 학자들은 충격과 참담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수메르(Sumer)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 문명이며,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보다도 무려 1천년 전의 문명이었다. 고고학자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Sumer)인들이 설형 문자를 사용하고 직조 기술의 사용으로 옷을 물들여 입고 다닐 당시, 이스라엘(Israel) 히브리인(Hebrew)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녔었다. 

 

성서 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여겼고, 에덴 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수메르(Sumer) 유적의 발견은 그야말로 전세계 기독교(Christianity)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 성경의 창세기는 수메르(Sumer) 문명의 설화를 베꼈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의 수메르(Sumer)에는 이미 에덴(Eden) 동산 설화가 있었고, 에덴 동산과 남자 여자가 등장하며 에덴(Eden)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까지 성서와 너무나 흡사한 설화가 있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와 흡사한 이야기도 있었다.

 

에덴(Eden)은 원래 수메르 말이었다. 에덴(Eden)이라는 명칭은 수메르어 에딘(E Din)에서 그대로 따왔다. 수메르어 (E Din)은 '초원 지대. 평원'을 의미한다. 낙원(樂園)에 대한 개념은 수메르의 이상향 딜문(Dilmun)에서 왔다.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쓰여진 수메르의 점토판 문서에는딜문(Dilmun)이라 불리는 낙원(樂園)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 세계인들이 보고 있는 성서가 수메르(Sumer) 문자의 판독으로 이제 한낮 휴지 조각에 처해지게 된 것에 성서 학자들은 참담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수메르(Sumer)지역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이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서 굉장한 주거 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수메르(Sumer) 문명에는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上下水道)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자기를 구워서 상하수도 시설을 만든 것이다. 인류 최초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사실에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수메르(Sumer)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Sumer) 문자의 발견이다.수메르(Sumer) 지역에서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사용했던 설형 문자인 것이다.

 

수메르(Sumer)의 길가메시(Gilgamesh)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敍事詩)가 있는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다. 인류 최초의 문명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노아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수메르(Sumer)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semer)에서 왔는데, '셈(Sem)의 나라' 라는 뜻이다.노아의 아들 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가 셈(Sem)이었고, '셈(Sem)의 나라' 라는 것이다.

 

■ 성경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희랍의 전설을 베꼈다.

 

수메르(Sumer) 발굴을 주도했던 성서 고고학자들은 막상 수메르(Sumer) 지역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 유적이 발굴되면 될수록 당황과 참담함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기독교(基督敎)를 뿌리채로 뒤흔드는 충격과 당혹감 그 자체였다.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고대 수메르 설형 문자의 해독으로 기독교(基督敎)의 성경이 수메르의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을 베껴 온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원래, 성서 학자들이 수메르(Sumer) 문명의 발굴에 적극 나선 이유는 성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대체 성서학자들에게 기독교(基督敎)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격을 준 수메르(Sumer) 문명 유적의 발굴 결과물은 무엇이었을까?

 

성경(聖經)의 내용들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고대 이집트(Egypt). 고대 희랍(Greece). 가나안. 시리아 등의 신화(神話)들 중에서 모방  표절해 왔다.

 

■ 구약 창세기는 수메르 창세기를 철저히 베꼈다.

 

기독(基督敎) 성경의 구약 창세기는 그야말로 수메르(Sumer)의 창조 신화를 그대로 베껴온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니푸르(Nippur)에서 발굴된 점토판(粘土販) 문서(文書)로 명백히 드러났다. 에리두 창세기(Eridu Genesis)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의 지배자인 엔키(Enki)는 바다의 신 남무(Nammu)와 출산의 신 닌마(Ninmah)를 시켜서진흙을 가지고 검은 머리의 사람들(Sag-giga. 수메르인들이 자신을 일컫는 말)을 만들었다.” [에리두 창세기(Eridu Genesis)]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구약 창세기 1:26. 2:7]

 

→ 성경의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진흙으로 인간을 창조하는 이야기’도 바로 이 수메르 창세기에서 그대로 베껴 온 것이 수메르(Sumer) 설형 문자 해독으로 밝혀졌다.

 

“원초적인 혼돈(混沌)과 함게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tiamat)가 어둠에 싸여 있는데, 육지의 남신 마르둑 (Marduk)이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tiamat)를 잡기 위해 바람을 타고 떠돌고 있었다.” [수메르 창세기]

 

“창조 이전의 원초적 상태는 혼돈(混沌)으로 형도 없는 허한 것이었으며, 그 혼돈(混沌)과 암흑의 물, 테홈(tehome)[바다의 여신 티아마트(tiamat)와 어원이 같은 말] 위에서 성령이 바람을 타고 떠돌고 있었다.” [구약 창세기]

 

→ 수메르 신화를 성경의 창세기에서 그대로 베꼈다가 마르둑(Marduk) 신의 이름만 여호와 성령으로 슬쩍 바꾸어 놓았다.

 

■ 노아(Noah) 홍수 신화도 수메르(Sumer)에서 베꼈다.

 

1849년 아시리아(Assyria)의 고도(古都) 니네베(Neh)의 유적에서 약 3만점 이상의 점토판(粘土販) 문서(文書)가 발견되었다. 아주 옛날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에서 전해져 오는 홍수 신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기독교(基督敎) 성경에 나오는 노아(Noah) 홍수 신화의 원전(原典)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이 판독되었을 때, 기독교계는 엄청난 충격파로 흔들렸다.

 

이스라엘의 수호신인 여호와(Jehovah)가 인류와 모든 생물을 멸하기 위해 일으켰다는 노아(Noah)의 홍수 이야기가 이스라엘(Israel) 히브리인(Hebrew)들의 독창적인 문학 작품이 아니라 수메르(Sumer) 와 바빌로니아 홍수 신화의 복사판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구약 성서 편집자들은 여러 가지 메소포타미아 홍수 설화를 구약 성서에 포함시켜 편집할 때 일부 명칭만 대체하였다.

 

성서 학자들이 기독교(基督敎) 성경(聖經)이 진실이라는 역사적 고고학적 사료를 찾을려고 발굴 작업을 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성경(聖經)이 수메르(Sumer)의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을 복제한 것이라는 입증되며 당혹감과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결국, 성경(聖經)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메르(Sumer)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을 표절하고 각색하였다는 것이 밝혀진 발굴 작업은 그야말로 기독교(基督敎)의 근간을 뿌리채로 뒤흔드는 역사적 발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성경의 솔로몬 왕의 재판 내용도 베껴왔다.

 

이스라엘(Israel)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되는 솔로몬(Solomon) 왕의 지혜 역시 베껴왔다. 솔로몬 왕의 재판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고대 인도(India)의 한 현명한 왕의 재판 이야기를 표절한 것이라는 사실은 일부 성서 고고학자들이나 역사가들 외에는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基督敎) 성경은 사실 표절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 현명한 (王)의 재판 [고대 인도(India) 달레르 전설]

 

“옛날 인도(India) 달레르(daler)라는 곳에 한 경건한 (王)이 살았다. 그의 경건함에 브라흐마(Brahma) 신도 감동하여 그에게 지혜를 내려주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내려 달라고 법정에 왔다. 아주 어려운 재판(裁判)이었기 때문에 재판관은 (王)의 지혜에 호소하기로 하였다. (王)은 두 여인 사이의 바닥에 선을 긋고 둘이서 아이를 잡아당겨 빼앗는 자가 아이를 갖게 된다고 하였다. 두 여인이 아이를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친(親) 어머니는 아이가 아파서 우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손을 놓고 그저 울기만 하였다. (王)은 아이의 고통에 조금도 애석해 하지 않는 여인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王)은 친(親)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주게 하고, 다른 여인에게는 벌을 주었다.“

 

★ 현명한 솔로몬(Solomon)의 재판 [성경의 열왕기 상 3:16∼28]

 

“어느 날, 두 여인이 아기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여 이스라엘(Israel) 솔로몬(Solomon)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솔로몬 왕은 칼로 아기를 반으로 갈라 두 여인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은병사(兵士)는 당장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빼들고 아기를 거꾸로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친(親)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아기가 반으로 잘리느니 차라리 상대편 여인에게 주어도 좋으니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하였다. 솔로몬(Solomon)은 칼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아기를 울고 있는 여인의 품에 안겨 주며, 어머니라면 아기의 목숨을 먼저 생각하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그는다른 여인을 궁 밖으로 끌어내게 하였다.”

 

 인도(India)의 현명한 (王)의 이야기와 이스라엘(Israel)의 현명한 솔로몬(Solomon) 이야기를 비교하면, 인간에게는 고대로부터 남의 것을 표절(剽竊)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기독교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이 현실화 된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의 수메르(Sumer) 설형 문자를 판독한 후, 성서학자들은 참담함에 입을 다물었다. 수메르(Sumer) 문명을 발굴하고 판독한 결과, 기독교(基督敎) 성경이 수메르 지역에 존재하는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복제판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간 기독교(基督敎)인들은 유일한 진리인양 착각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들고 있는 그토록 거룩했던 성경(聖經)이 이제 한낮 헛소리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眞理)인양 착각했던 어리석음독선(獨善). 아집(我執). 무지(無知) 등이 세상 천지에 그대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이제, 장차 유럽과 미국에서 기독교(基督敎)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이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 예수 어머니 마리아(Maria)는 동정녀 아니였다?

 

성경(聖經)의 내용들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고대 이집트(Egypt). 고대 희랍(Greece). 가나안. 시리아 등의 신화(神話)들 중에서 모방  표절해 왔다. 예수(Jesus)가 동정녀(童貞女)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많은 처녀들을 두고, 남편(요셉)이 있는 성모 마리아(Maria)를 택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전혀 있을 수 없는 얘기이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내용은 고대 신화들을 모방한 것이다. 흰두교의 크리슈나(Krishna)의 어머니도 동정녀였고, 이집트(Egypt) 호루스(Horus)의 어머니도 동정녀였고, 메소포타미아 조로아스터(Zoroaster)도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이브의 어머니 소피아(Sophia)도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희랍신화의 디오니소스(Dionysos)도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

 

고대 신화나 종교의 바탕은 동정녀 출산이었다. 마치 신격화된 숭배의 대상은 모두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그래야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얻고 들어갔다. 그래서 “예수(Jesus)가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났다.” 라고 둔갑시켜 놓았다. 고대 신화나 고대 종교를 모방한 것이다.

 

예수가 살았던 로마제국 당시, 중동과 지중해 일대를 풍미하면서 기독교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다. 초창기의 기독교 교부들은 “옛날에는 신화에 지나지 않던 형상들이 우리 구세주 예수 안에서 되살아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모방의 근거를 신비로운 표현 속에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이같은 표현은 성경의 내용이 옛 신화에게서 모방해 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 페르시아 미트라(기독교 600년 전)도 동정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B.C 7세기경(약 2,600년전) 페르시아의 미트라(Mitra)는 12월 25일 동정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위대한 방랑교사였고, 기적을 행했으며, 12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 후에 다시 부활해서 일어났다. 미트라가 부활한 날에 미트라 교도들은 축제를 벌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과 일치되었다. 미트라(Mitra)의 기원은 고대 인도. 이란의 민족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었다. 고대 신화나 종교의 바탕은 동정녀 출산이었다. 마치 신격화된 숭배의 대상은 모두가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그래야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얻고 들어갔다. 예수의 동정녀 출산도 마찬가지이다.

 

죽어서 부활하는 신인(神人)의 고대신화가 있는데, 이 신인(神人)은 지역에 따라 미트라(페르시아), 오시리스(이집트), 디오니소스(그리스), 아도니스(시리아), 바쿠스(로마)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 졌다. 오시리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육체를 가진 신(神)이며, 구세주이고 하느님의 아들로 묘사된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녀(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그들은 세 양치기가 찾아오기 전인 12월 25일에 동굴이나 누추한 외양간에서 태어났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세례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고, 결혼식장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奇蹟)을 보였으며,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부활절(復活節) 무렵에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復活)했다고 한다.

 

2) 인도 흰두교의 크리슈나(기독교 600년 전)도 십자가에서 부활했다.

 

인도의 크리슈나(Krishna)는 힌두교에서 두 번째로 추앙받는 위격의 성자(聖子)이다. B.C 7세기경(약 2,600년전) 크리슈나(Krishna)는 인도의 한 부족에서 태어나, 스스로 태양신을 숭상했으며, 실천윤리를 중시하는 통속종교를 창도(唱導)했다. 천사와 현인들 그리고 목동들이 크리슈나의 탄생을 지켜봤다고 한다. 크리슈나(Krishna)는 동정녀 처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갠지스강 강가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크리슈나는 나무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는 그를 죽인자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하나님으로 불리워졌으며 구세주로 불리워졌다. 그는 흰두교의 삼위일체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이었고, 자신을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했으며, 나환자와 맹인, 귀머거리를 치료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2,600년 전의 크리슈나의 행적(行蹟)을 그대로 모방한 흔적이 보인다.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모든 것의 생명이며, 세상을 떠받치는 자이며, 세상의 길이며, 그 피난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사물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삶을 여러 번 반복하여 윤회전생(輪廻轉生)하고, 너희들도 삶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삶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3) 이집트의 호루스(기독교 이전)도 12월 25일에 태어났다.

 

이집트의 호루스(Horus)는 고대 이집트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神)이며, 오시리스의 아들이다. 호루스(Horus)는 12월 25일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30살 때 세례를 받았고, 12 제자가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했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물위를 걸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무덤에 묻혔고 부활했다. 호루스는 길이요, 진리요, 빛이요, 메시아로 칭송되었다. 아들로서의 '유아(幼兒) 호루스'는 아기 예수의 원형으로 비교되기도 한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고대(古代) 이집트의 호루스(Horus)의 행적(行蹟)을 그대로 모방한 흔적이 보인다.

 

4) 기독교의 주일(일요일)은 조로아스터교의 표절?

 

유대인들이 중요하고 성스럽다고 여기는 날은 일요일이 아니고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토요일보다 일요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원래 일요일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관습이다. 원래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날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예수 이전 (기원전) 약 600년경에 페르시아에 “조로아스터” (Zoroaster, B.C 628-551)라는 현인(賢人)이 있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서양문명의 한 근원을 이루는 중요한 신앙적 사상을 전파하였다. 조로아스터는 12월 25일 동정녀(童貞女) 처녀에게서 태어났고, 그는 위대한방랑교사였고, 기적을 행했으며, 12 제자가 있었다. 그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 후에 다시 부활(復活)했다. 그가 부활한 날에 페르시아의 교도들은 축제를 벌였는 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과 일치된다.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생긴 것은 예수 이후 300여년 후의 일이다. 물론 그 전에 지하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와는 본질과 진리의 틀이 완전히 달랐었다.

 

5) 부활절(Eeaster)행사는 토속 종교의 모방?

 

부활절의 축제일은 원래 그리스도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모두 파간(pagan) 토속종교에서 얻어 온 것이다. 그래서, 그 날짜가 매년 변한다. 파간의 부활절은 3월 21일 춘분(春分)이 지나고첫 보름달이 지난 후에 첫 월요일을 부활절이라 한다. 토속종교를 크리스천들은 이단이라고 했고, 그들을 파간(Pagan)이라고 했다. 파간은 원래 파구스(pagus, 시골사람)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파간(pagan)의 부활절은 음력 달력에 의해 만들어졌고 월요일이었는데, 그리스도교에서 변형하여 일요일로 하였다. 토속종교인들은 월요일을 중시하며 월력(月曆)인 사용하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페르시아의 태양신(男神) 종교를 모방하여 일요일을 중요시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주일을 일요일로 바꿨다. 춘분(春分)부터 부활절이 되는 일요일까지의 기간은 에오스트라 여신(Eostra, 라틴어,땅의 여신)의 배란기로서 임신하는 기간이었다. 가나안 지방에서 입춘(立春)이 되어 비가 오는 때에 땅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이 임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임신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하여 성교를 위한 축제를 했던 풍습과 마찬가지인 신앙이다.

 

또한, 부활절 때 계란에 붉은 색을 칠하는 것이 관례인데, 서양의 전설에서는 계란은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과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절 때 특히 동구 유럽에서는 계란에 붉은 색을 많이 넣어 아름답게 칠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 사후 약 500년간의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많은 기독교인 (특히 gnosis파)들이 인간의 환생 윤회설을 자유로이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및 교회 역사의 불편한 진실

 

▶ 동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k1gbWRhTV34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04월 13일, 기독교 군대가 처음으로 조선(朝鮮) 땅을 침략하던 날이다. 왜군(倭軍)의 배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렸다. 25만 왜군(倭軍)의 10%, 일본군 총수의 대부분은 기독교 원정대 즉 기리시단(吉利支丹)이었다. 조선인의 와 를 베고, 살 가죽을 벗기고, 인육을 먹던 기리시단(吉利支丹)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조선 땅을 행군했다. 7년간의 임진왜란 전쟁은 (神)의 이름을 가장한 한국판 십자군 전쟁이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기독교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신학 교수 김인규. 성결 교신 학교 논문). “임란(壬辰倭亂)은 주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일본 기독교(基督敎)를 지켜낸 승리의 역사이다.” (일본 관구장 고메즈의 비서 프란시스코 파시오. 1598 일본보).

 

유럽의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1,096-1,272)은 유럽 전역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여호와 주님을 믿지 않는 자, 모두 처형하라!” 십자군에게 지급된 면죄부는 천국(天國) 보장권과 경제적 보상이었다. 무차별 살상에 대한 그들의 죄의식은 오직 주님만이 용서하셨다. 이 후, 로마 제국의 역사는 기독교 선교를 구실삼아 각 지역의 민족 전통 말살과 횡포폭압강간살인 등을 일삼는다. 이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아편 시장 확보를 목적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朝鮮) 상륙을 시도하였다. 1846년 식민지 개척의 도구로 프랑스 선교사 함대가 진입했다.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에서 총칼을 들고 행패를 부리던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로 둔갑되었다. 1868년 대원군(大院君)의 부친 남연군 묘지 도굴 사건에 선교사들이 앞장섰다.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미일 협약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에 기독교 선교 자유를 보장하는 열강의 국제적 음모였다. 일제 식민 통치 시대에 보호를 받으며 친일 제국의 기독교는 번성의 꽃을 피웠다.

 

1985년 서울시 단군(檀君) 성전 건립을 기독교 목사들이 반대했다. 1980년 이후에는 단군(檀君) 동상의 을 자르고 장승 파괴 및 불상 파손의 만행을 저질렀다. 2007년 보수 기독교 뉴라이트는 민족 역사를 말살한 역사 교과서를 발간했다. 2008년 기독교 목사와 그 신도들은 태백산 천제단(天祭壇)을 파손했다. 그들이 말하는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거주하며 당신의 모든 행동을 매일 낱낱이 지켜 보고 있습니다. 이 투명 인간은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특별한 죄의식 목록을 갖고 있죠. 만약, 당신이 10가지 중 한가지라도 지키지 않으면 고통과 고뇌로 가득찬 아주 무서운 지옥(地獄)에 당신을 떨어뜨려 숨막힘. 화형 등으로 비명과 눈물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시며 항상 돈(Money)이 필요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하신 그분도 (Money)은 어찌 못하십니다.” (조지 칼린의 기독교 풍자). 

 

기독교는 종교 장사(壯士)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세금도 내지 않지만,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사상 최고의 공공연한 끝내주는 거짓말입니다. “설교 시간 처음부터 졸기 시작해서 축도할 때 정신이 드는 성도! 헌금은 준비 않고 지갑 속에서 천원짜리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는 자! 이런 믿음은 주님이 원하지 않죠. 예수님 믿으면 천국! 불신자는 지옥! 헌금 천원짜리 믿음은 주님이 원하지 않죠!” 그렇다면, 그들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땅 가운데 있는 모든 불교 사찰이 무너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2007년 6월 4일 부산 기독교 청년 연합회). “믿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의 자식이라 하는 사람들을 지옥불에 던져 버리는 당신네들의 신(神)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법정 스님). 잔인한 역사. 거대한 음모. 이 땅의 기독교! 그 불편한 진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부활하지도 않았다!

 

1) 1886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의 자료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 후, 아리마테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허가를 받아 예수를 장사지냈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 처형 후에 들어갔던 무덤은 아리마테아 요셉의 정원이었다. 그리고, 아리마테아 요셉과 본디오 빌라도 로마 총독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할 때의 조작극(造作劇)을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예수(Jesus)는 이스라엘 유대인의 아브라함후손이며, 이삭야곱다윗의 후손이며,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추구한 것은 바로 유대민족의 메시아(Messiah)가 되는 일이었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절대 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아(Messiah)로 추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대의 신화와 종교에서 언급되는 십자가 부활(復活)이라는 조작극이 필요했고, 유대인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믿게 할 종교적 필요가 있었다.

 

2) 성경을 보면, 예수가 로마 (法)을 어기거나 로마 당국과 충돌한 일이 전혀 없었다.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를 원수로 생각했다면 로마 당국의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의 손을 빌리지 않고 유대인 율법으로 직접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법으로 예수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로마 사형법인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원래 로마의 십자가 사형법은 죄수의 시체를 말라 비틀어질 때 까지 십자가에 놓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죽은 것만 확인하고 곧바로 십자가에서 풀어 주었다.

 

3) 예수는 인도와 티벳 및 이집트에서 수행을 하고, 의술(醫術)을 배우고, 고전(古典)을 공부하고 돌아오더니, 만민 평등을 주장하며 유대 민족 메시아 행세를 하고 다녔다. 유대인 집권층에서 볼 때, 불과 몇 년 사이에 불쑥 나타난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인기가 높아지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루살렘 유대인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Sanhedrin)을 비롯한 유대인 집권층과 로마 당국은 그들 권익에 위협을 느꼈고, 이들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계획했다. 이 때, 예수는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렸고, 그래서 부패한 로마 집권층의 본디오 빌라도 총독을 돈으로 매수했다. 본디오 빌라도는 잔악한 폭군이었으며, 반면에 부패하여 뇌물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요셉(Joseph of Arimathea)과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로마 총독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예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찾아갔고, 예수는 자기가 원하는 조작극(造作劇)을 부탁했고, 결국 무사하게 살아 날 수 있었다.

 

4) 마가 복음 15장 44절,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 본디오 빌라도 역시 예수가 그렇게 빨리 죽는 것에 대해 놀랐다.” 요한 복음 19장 32절, “로마 형리들이 예수 다리를 부러뜨리려 했을 때, 예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예수의 다리가 부러뜨려지지 않은 상태로 예수의 발이 십자가에 고정되었다. 정상적인 십자가형의 경우, 2-3일 정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했는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묶여졌을 때, 예수는 시간을 맞추어서 적절한 상태로 죽은 척 하였다. 이렇게 적절하게 죽은 예수는 미리 준비된 동굴 형태의 무덤에 안치 되었다.

 

5) 마태 복음 27장 60절, “이 무덤은 아리마테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의 개인 소유이다.” 누가 복음 23장 49절, “예수의 아는 자들과 따라온 여자들이 모두 멀리 서서 구경했다.” 이것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만 목격하게 한 십자가 사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개인 소유지에서 가족 몇 사람과 로마 당국자들이 모여서 행해진 조작극(造作劇)이었다.

 

6) 예수는 십자가 처형의 조작극(造作劇)을 꾸밈으로써 유대인 집권층의 질시와 저주를 모면하게 되었고 동시에 유대인 메시아(Messiah)로서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후, 가사(假死) 상태에 있었고, 예수의 후원자인 아리마테아 요셉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예수의 몸을 인수받아 동굴 무덤에 안치시킨 후, 3일간 정성껏 치료한 후 회복되었다. 3일 후, 그는 가까운 소수 몇 사람에게만 나타났다. 결국, 예수는 모든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활(復活)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와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나타나서 마치 부활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진짜로 부활했다면 분명 여러 대중들 앞에 나타나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해 보이며 당당하게 설파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독일의 신학자(神學者)인 홀거 케르스텐(Holger Kersten)이 쓴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보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으며, 십자가에서 부활하지도 않았다는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우리 아버지는 대체 뭘 한 거예요?

 

어느 날, 들판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예수(Jesus)가 엄마 마리아(Maria)에게 물었다.

예수 : 엄마! 난 어떻게 태어난 거예요?

마리아 : 응! 그것은 하느님이 너를 나에게 주신 거란다.

예수 : 그럼, 하느님이 엄마에게 선물로 주셨단 말이예요?

마리아 : 암! 그렇고 말고!    

예수 : “나 참!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요셉 Joseph)는 도대체 뭘 한 거예요?”

마리아 : “믿어야 천국(天國)에 갈 수 있느니라!”

 

 예수 탄생과 하느님 아들 조작 사건의 비밀

 

1) 요셉(Joseph)은 둘째 부인 성모 마리아(Maria)와 6월에 약혼(約婚)했다. 요셉은 이스라엘 다윗 왕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그의 부인이 될 사람은 제사장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약혼(約婚)이 확정된 다음 3개월 후인 9월에 1차 혼인 선언을 하고, 12월 첫 보름 동안만 두 사람의 동침이 허락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해 9월에 아이를 출산하기 위함이며, 9월은 성스러운 기름 부음의 달이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요셉(Joseph)은 제사장이 명령한 12월 초순까지 기다리지 않고 6월에 약혼(約婚)을 하자 마자 곧바로 둘째 부인 마리아(Maria)와 동침을 한 것이다. 율법을 어긴 임신(姙娠)을 하게 되자 요셉은 몹시 난처했다. 쉽게 말해서 속도 위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 뿐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제사장을 찾아갔고, 제사장은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를 특별히 취급하도록 했다. 즉 하느님에 의해 잉태하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Jesus)는 하느님의 잉태에 의해 태어났다고 발표하게 된 것이다.

 

3) 2세기나 그 이전에 씌여진 것으로 알려진 ‘유아(幼兒) 복음서’는 예수가 아주 어렸을 때의 예수(Jesus)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어린 예수가 아주 영리했지만 난폭하고 버릇이 없고 신경질이 대단히 심한 어린이였음이 묘사되고 있다. 그 중에는 자기 심기를 건드린 다른 아이를 죽인 일도 있었고, 자기의 가정 교사를 죽도록 두들겨 팬 적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성경을 만드는 목적을 예수의 신격화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혈통 관계는 성경의 기록에서 고의적으로 제외시켰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4) 신약 성서는 여러 차례 공의회를 거치면서 주교와 장로들에 의해 기록이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정경(正經)이고, 교회 이익을 크게 해치는 내용은 외경(外經)이라고 하여 구분하여 처리하였다.

 

 영국 법원, 예수 부활은 거짓이었다! 판정

 

 

[동아일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 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년 간의 조사 끝에 1982년 ‘성혈과 성배’(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Jesus)는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었다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 요셉(Joseph of Arimathea)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Pilatus)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演劇)을 하고는 그 뒤, 부활(復活) 연극(演劇)을 한 다음 로마 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Jesus)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Jesus)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Lazarus)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 교회를 세워 주교(主敎)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Jesus)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Merovinger)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8개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Jesus) 혈족들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인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많은 예수(Jesus)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 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시대 성당 기사단의 지방 지부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재산을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영국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들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예수와 관련된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3년간 현지 답사하여 무덤까지 확인하고는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정의 주심 판사는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일부 기독교인들이 목을 매고 자살(自殺)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졌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재판 과정을 지켜본 영국 기독교인들의 약 80%가 타종교로 개종(改宗)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일부 언론에서 보도를 하였고,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한국의 기독교는 엉뚱하게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동아일보, 입력: 1982.02.20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그동안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토리노 성의(聖衣)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세마포(細麻布)’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졌다. 국내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聖衣)1세기 때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공개 전시되며 보관 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聖衣)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을 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Torino)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알로에 추출물)100(40kg)이나 준비한 것(요한 복음 19:40)도 반증(反證)하는 자료이다. . 땀 등에 의해 그대로 적셔져 있던 토리노 성의(聖衣)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사람을 감싼 세마포(細麻布)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10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聖衣)13-14세기에 만들어 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0905일에는 토리노 성의(聖衣)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였고,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었다. 토리노 성의(聖衣)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라는 것을 오히려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