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굴레

어느 조상(祖上)의 13대 자손(子孫) 걱정

마도러스 2014. 2. 6. 16:09


어느 조상(祖上)의 13대 자손(子孫)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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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日帝) 식민지 시대, 경상도 안동 도산면에 사는 유생(儒生) 권모는 어느 날 갑자기 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승 유람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힘썼으며 특히 영남 학파를 이룬 퇴계 이황 선생과 학봉 김성일 선생을 매우 존경하였고, 늘 그 가르침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차에 저승에 가서 푸른 산과 맑은 물을 구경하고 어떤 정자(亭子)를 지나는데, 정자를 보니 깨끗한 옷을 입은 학자(學者)가 정갈한 자세로 정좌하여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정자에 올라 학자에게 예의를 다해 인사를 올리고 난 후, 그 용모를 보자마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일평생 학문을 닦으면서 만나 뵈어 가르침 받기를 소망했던 학봉 김성일 선생이 바로 그 학자가 아니던가!


그는 자기 소망을 이제 이루었음을 크게 기뻐하며, 그리움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런데 선비로서의 올곧은 면모를 기운에 실어 주위를 빛나게 하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안색이 매우 어둡고 그 용모는 심히 수척해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그는 더더욱 조심하면서 인사를 올리고는 학봉의 안색을 근심하였다.


유생(儒生) 권모 : 아이고~~학봉 선생님요. 선생은 살아 계실 적 학문의 뜻을 바로 세워 대성(大成)을 이루신 어른이 아니십니껴. 퇴계 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제자로서 새로운 학문의 기풍을 주창하신 어른이 이 어찌 용모가 심히 상하셨는지요?


학봉 김성일 : 아이고~~말도 말게. 이 사람아. 내가 죽은 이후, 대대로 우리 집안의 종손(從孫)이 비록 많은 재산을 일구고 나라에 충성하였지만, 자손이 귀하여 내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이번 13대 종손 김용환이가 천하의 파락호(행세하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허세방탕하는 사람)로 집안 재산을 탕진하니, 내가 어찌 큰 근심이 없을고. 다만 용환이가 파락호 행세를 하는 것에도 큰 뜻이 있다하니, 믿고 지켜볼 수 밖에...


이 이야기는 경북 중부 지방에 널리 전해져 내려오는 실제 이야기이다.


■ 사람이 일가(一家)를 이루고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그 자손들을 위해 보살피거나 근심을 가지는데, 이 이야기는 조상 선령신(先靈神)이 자손(子孫)들에 대해 매우 노심초사(勞心焦思)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학봉 김성일 선생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경상도 일대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義兵) 봉기를 적극 도모한 인물이다.


그러나, 인조(1595-1649) 반정 이후 서인 세력의 극심한 역사 왜곡이 이루어지고 그들의 가치관이 세상의 정론이 되었다. 그리하여 학봉은 나라를 위한 큰 공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초기 임금을 속였다는 이유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의 공적이 사실 역사에 남아 혁혁한데도 그와 그의 자손들은 부귀와 명예를 바라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도리와 의리만을 다 하였다. 특히 이 전설에서 나오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종손 김용환 선생은 파락호 행세를 가장하며 막대한 독립 운동 자금을 전달했으나 그 자신의 드러나지 않음으로 그가 죽은 후에야 독립 운동 사실이 알려졌다.


오직 나라를 위해 도리와 의를 다 할뿐,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학봉과 그의 후손 그리고 학봉이 형성한 남인 학파의 후세들은 일제(日帝) 식민지 시대의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위태로움 속에서도 오직 선비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잊지 않고 우리나라 독립 운동의 주체가 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