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글 예찬

원로 학자, 한자(漢字)는 우리 글

마도러스 2011. 4. 26. 20:38

 

원로 학자, 한자(漢字)는 우리 글


한자(漢字)의 기원과 발명을 둘러싸고 한국(韓國)과 중국(中國) 사이에 논쟁이 불붙을 조짐이다. 이 논쟁은 원로 국어학자인 인제대 진태하 석좌 교수가 “한자(漢字)는 우리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진태하 교수는 2011.04월 중순 한자(漢字)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자(漢字)는 중국 문자가 아니라, 우리 조상 동이족(東夷族)이 만든 우리글이며, 중국 학계에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데 우리만 모른다”고 지적했다.


진태하 교수 주장의 핵심은 동이족(東夷族)의 문자가 3400년 전, 은(殷)나라 때 갑골(胛骨) 문자로 발전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한자(漢字)라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 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진태하 교수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뜨거운 논쟁이 중국에서 일고 있다. 이 글은 신화 통신에도 실렸다.


중국 인터넷 뉴스 사이트 21CN은 2011.04.25일 홈페이지에서 ‘중국 문화는 왜 늘 한국에 당하는가?’ 라는 제하의 머리 기사를 통해 반박하고 나섰다. 21CN은 특히 한국(韓國)이 공자(孔子)이태백(李白), 서시(西施)(춘추시대 말기 월나라의 미인) 등 유명인의 국적과 활자(活字) 인쇄술, 혼천의(渾天儀)의 발명, 단오절(端午節), 한의학(韓醫學), 풍수(風水)와 같은 문화 유산도 모자라서 한자(漢字)의 소유권에까지 시비를 걸고 있다고 공격했다.


한자(漢字)의 발명 논쟁이 점화됐다고 할 수 있다. 21CN은 전문가 말을 인용, ‘동이족(東夷族)’이란 고대 동방 민족의 통칭으로, 많은 부족이 포함돼 있다며 동이족(東夷族)이 한국인의 선조(先朝)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한자(漢字)가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오랜 역사 과정을 겪었으며, 동이족(東夷族)이 기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한자(漢字)의 발명자가 동이족(東夷族)이라는 말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인들은 ‘중화(中華) 민족’이라는 개념도 새롭게 들고 나왔다. 동이족(東夷族)이 이미 중화(中華) 민족에 흡수됐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1CN은 동이족(東夷族)이 주거했던 땅도 산둥(山東)성 등 중국의 동방 지역이며 이곳은 지금은 중국 영토라고 덧붙였다.


21CN은 또 진태하 교수가 ‘중국의 임어당(林語堂)과 사학자 왕옥철(王玉哲)중국(中國)의 문자(漢字)는 모두 동이족(東夷族)이 창조했고, 공자(孔子)동이족(東夷族)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 두 사람이 중국 학계를 대표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 신문 매체는 “진태하 교수의 주장이 오류 투성이고 허점도 끝이 없다”며 “한국인이 이처럼 중국과 각종 전통 문화 소유권을 놓고 다투는 까닭은 한국(韓國) 문화 자체가 중화(中華) 민족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계승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비꼬았다. (세계일보 베이징 주춘렬 특파원, 입력: 201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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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의 시조로 불리는 창힐(B.C.28세기-B.C.27세기)은 동이족(東夷族, 조선족) 사람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14대 치우천황(B.C 2,707년 즉위)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한민족은 가장 과학적인 표음(表音) 문자(한글)도 만들었고,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表意) 문자(한자)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이 유산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


창힐(倉힐)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녹도문자(鹿圖文字)를 배웠고, 녹도문자(鹿圖文字)를 계승 발전시켜 창힐 문자를 창안했다. 그리고 창힐은 창힐 문자를 중국에 널리 보급시켰다. 이로써 중국에 최초 문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창힐(倉힐)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치우천황(B.C 2,707년 즉위)의 제후로서 배달국의 녹도문자(鹿圖文字)를 중국에 전한 사람이다. 창힐 문자는 다시 은(殷 B.C 1,600-1,046)나라 시대에 이르러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했다. 은(殷)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으로 망명하면서 갑골문자를 고조선으로 들여왔다.


그래서,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말엽에 녹도문자, 가림토 문자, 갑골문자를 함께 사용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반면 녹도문자(鹿圖文字)와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리고, 갑골문자(甲骨文字)는 다시 한자(漢字)로 발전하였다.


■ 명지대 진태하(陳泰夏) 국문학과 교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한민족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면서
갑골문자(甲骨文字) 속에는 동이족(東夷族)의 문화가 깃들여 있다고 말한다.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조(漢朝) 때 한자(漢子)로 완성된다. 갑골문자(甲骨文字)는 거북이 배뼈와 소 어깨뼈에 주로 새겨진 갑골문자(甲骨文字)는 3,400년 전 중국 은(殷)나라 때 사용된 것으로, 황하 이북 은(殷)나라 도읍지였던 지금의 안양(安養)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한편, 세계 최초의 문자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녹도문자(鹿圖文字)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시대에 이르러 제3대 단군이신 단군 가륵(嘉勒) 2년(B.C 2,181년)무렵에 가림토(加臨土) 문자로 계승 발전되고, 고조선(古朝鮮)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조선(朝鮮) 시대의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계승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