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 환생幻生

제사(祭祀) 문화와 인간의 환생(還生)

마도러스 2010. 11. 18. 11:33

 

제사(祭祀) 문화와 인간의 환생(還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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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경(地藏經) 제7품에 “죽은 자(死者)를 위해 제사(祭祀)를 올리면, 그 은공(恩功)의 1/7은 죽은 자(死者)에게 돌아가고, 대부분(6/7)은 제사(祭祀)를 올리는 자손(子孫)에게 은공(恩功)이 돌아간다!” 라는 말이 있다. 제사(祭祀)를 올리면자손(子孫)에게 복(福)된 일이 생기고 자손(子孫)이 잘 된다는 뜻이다. 또한, 조상(祖上) 천도식(薦度式)은 죽은 자를 위한 천도(薦度) 의식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천도(薦度)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효도(孝道)가 중요하다. 조상(祖上)에게 잘하면 내게도 복(福)이 오기 때문이다.


■ 환생(還生)은 진짜 있는가?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 여인을 처음 본 순간, 중년의 부인답지 않은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참 이상하다!’ 싶어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어쩐 일로 이 곳에 오셨습니까?”


그러자, 여인은 “저에게는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딸 하나가 있는데, 얘가 너무 말썽을 피우네요!. 학교에 무단결석하질 않나, 커닝을 하지 않나, 자꾸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법사님, 좀 도와 주세요!” 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딸은 나를 보자마자 뭔가 호소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은 나에게 보낸 눈빛과는 180도 달랐다. 너무나 공격적인 그 눈빛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했다. 그 순간, ‘왜 딸이 엄마를 무섭게 노려볼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윽고 음식을 올리고 구명시식(救命施食)이 시작되자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졌다. “내가 너에게 시집살이를 조금 시켰다고 네가 나를 굶겨 죽여? 이 독한 것 같으니라고!” 피를 토하듯 강한 음성이 내 귀에 꽂혔다. 물론 그녀와 그녀의 어린 딸은 듣지 못하는 영혼(靈魂)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의 돌아가신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 영혼(靈魂)은 자신의 며느리였던 그녀(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그래, 네가 우리 집 며느리가 될 때부터 걱정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늙어 힘이 없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밥을 굶겨? 이 못된 년 같으니라고!”


내가 이 말을 그녀에게 전하자, 그녀는 갑자기 시어머니 영혼(靈魂)을 향해 넙죽 엎드리며 “어머니, 그때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단지, 어머니께서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해 밥의 양을 조금 줄였을 뿐이에요! 고의로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어머니, 화를 푸세요!” 라고 말하며 눈물로 하소연했다.


하지만, 시어머니 영혼(靈魂)은 그녀를 비웃으며 “이미 늦었다. 네가 나한테 복수를 했듯이 나도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미 인간으로 환생(還生)한지 오래다!”라고 말하며 “네 딸이 바로 나(시어머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이성을 잃고 통곡하는 그녀에게 “죄 값은 받으셔야 합니다. 모든 죄를 기꺼이 받으신다면, 언젠가는 시어머니 영혼(靈魂)께서 당신을 용서해주실 날이 올 겁니다.” 라고 말하고 정성껏 시어머니 영혼(靈魂)께 그녀의 선처(善處)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녀는 다시 나를 찾았다. 몰라보게 좋아진 딸을 데리고 말이다. 그녀는 “시어머니께 못했던 효도 만큼 딸한테는 최선을 다 할 겁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이미 부드러운 어머니 그 자체였다. [차길진의 미스터리 Q]


■ 얼마 전 일이다. 30대 여성이 구명시식(救命施食)을 신청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상태. 그러나 친정집의 제사(祭祀)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오빠 대신 제가 제사(祭祀)를 올려도 부모님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결혼한 그녀가 친정집 제사(祭祀)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라니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그녀에겐 위로 오빠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새 언니 되는 사람이 한사코 제사(祭祀)를 지내기 싫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종교가 달라서도 아니었다. 신세대 며느리라서 그런지 제사(祭祀)가 번거롭고 귀찮다는 핑계였다. 이미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상태라 누구 하나 밀어붙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녀는 오빠 대신 제사(祭祀)를 지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구명시식(救命施食)에 나타난 부모님 영혼(靈魂)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야 며느리보다 딸이 해주는 밥이 더 맛있고 편하다. 그러나 너의 새 언니를 잘 설득해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해라. 오빠가 떳떳하게 주관을 밀고 나가면 분명히 제사(祭祀)를 지내겠다고 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제사를 올리겠다는 뜻을 꺾고 오빠와 함께 새 언니를 설득해 겨우겨우 제사(祭祀)를 올리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딸이 제사(祭祀) 올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다. 오히려 딸이 제사(祭祀)를 올려준다면 더 좋아들 하신다.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은 자식인데 여자라고 제사(祭祀)를 못 지낼 이유가 없다는 여론이다.


또한 외갓집 제사(祭祀)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선생도 셋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외가(外家)의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외가(外家)에 제사(祭祀)를 지낼 사람이 없으면 외가(外家)의 제사를 가져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사항은 구태여 구명시식(救命施食)으로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이미 영계(靈系)엔 남녀평등(男女平等)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차길진의 미스터리 Q, 입력: 일간스포츠 2010.04.07)]


■ 최근 여성(女性)의 지위가 많이 향상됐다. 여성 총리, 여성 장관 뿐 아니라 이제는 서울 시장도 여성 후보 경쟁 시대가 됐다. 과거 헌법 재판소장으로 여성 후보자가 거론됐었고, 사법 연수원, 경찰 대학 등에도 여성 인재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야말로 여성 시대가 된 셈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여성(女性)의 지위가 월등했다. 고려(高麗) 시대 때 여성은 남성과 자유 연애를 했고, 유산 상속 때도 딸. 아들의 재산 분배는 거의 동등했었다. 게다가여성이 제사(祭祀)를 지낼 수 있었으며, 남편이 죽으면 재가(再嫁)도 허용됐었다. 딸의 자식인 외손(外孫)도 가계(家繼)를 계승할 수 있었고 호주(戶主)가 되기도 했다.


조선(朝鮮) 초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朝鮮) 초기엔 ‘남자들이 장가(丈家) 들었다' 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당연히 처가(妻家)에 들어가 처가(妻家) 살이 생활을 했고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살았다. 요즘 같으면 데릴사위니 뭐니 하며 꺼렸겠지만 조선 초기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전통이 무너진 것은 조선(朝鮮) 중기 때부터이다. 유교 사상이 뿌리내리면서 남아선호(男兒選好) 사상이 팽배해지고 여성 지위가 급속히 하락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물론, 제사(祭祀)나 재산도 상속받지 못했다. 남편이 죽으면 재가(再嫁)도 못했고 바깥 남자를 함부로 만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조선(朝鮮) 후기의 전통이 관습(慣習)처럼 남아서인지 심심찮게 제사(祭祀)에 대해 물어오는 분들이 있다. "제가 여자인데 제사(祭祀)를 지내도 될까요?"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오빠와 동생이 교회를 다녀서 제사(祭祀)를 지낼 수 없대요", "저희 집은 딸만 둘이라서 제사(祭祀)를 지낼 사람이 없어요", "남동생이 제주(祭主)인데 유학 중이에요" 등등이다.


■ 추석 제사(祭祀) 날이었습니다. 속으로 중얼중얼 태을주(太乙呪)를 읽고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이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저 분들이 우리 조상님들 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분은 마당에 서계셨고, 또 한분은 마루에 서계셨고, 나머지 한분은 안방으로 들어오셔서 앉으셨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오신 분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신 친(親)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마루에 서서 화를 내시는 분이 증조(曾祖) 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증조(曾祖)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이 교회를 다녀서 기독교(基督敎)식으로 방안에 앉아서 기도만 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얼굴까지 붉어지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제사를 안 지내는 후손들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마당에 서계신 분은 고조(高祖) 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조(高祖) 할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한숨을 쉬시고 혀끝을 차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더니, 잠시 후 대문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증조(曾祖) 할아버지께서 따라 나가셨고, 친할아버지는 좀 더 있다가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가는 모습 같았습니다.

 

기독교식의 예배 및 기도가 끝나고 친척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 저는 큰 아버지께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증조(曾祖)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얼굴은 동그란 편이고, 무서운 분이셨죠?”라고 했더니, “네 말이 맞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물어 보았습니다.


“고조(高祖) 할아버지는 인자하신 모습에 키도 크시고 풍채가 좋으시고 청색 도포를 즐겨 입으셨구요?” 큰 아버지께서는 “네가 어떻게 그렇게도 딱 맞게 잘 아느냐?” 라며 신기해 하셨습니다.

 

이날 체험으로 “명절(추석. 설)이 되면, 조상님들은 자손을 보기 위해 직접 찾아 오신다!” 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제사(祭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이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를 제대로 지내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스러웠습니다. 기독교(基督敎) 집안이라 조상님께 제사(祭祀)를 못 지내드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못난 자손들을 용서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출처: 월간 개벽)


★ 조선(朝鮮) 시대 율곡 이이 선생퇴계 이황 선생이순신 장군 등등 모두 ‘처가(妻家)살이’를 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결혼 문화는 일단 모계(母系) 사회였다. 결혼을 하게 되면 먼저 처가(妻家) 살이를 하고 애를 낳고 애가 성장하면 따로 분가하는 것이 전통적인 문화였다. 물론 조선(朝鮮) 초기에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친영론(親迎論)’에 따라 여자가 결혼하면 먼저 남자 집에서 살게 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그다지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중종도 이런 시책을 추진했지만 그다지 빛을 바라지 못하였다.

   

그런데, ‘처가(妻家)살이’ 풍습이 왜 없어졌을까?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사회 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儒敎)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고, 상류층 위주로 퍼져있던 중국 풍습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하층 민중에 보급하면서 우리 전통 가족 문화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주자(朱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주자(朱子)의 제자들이 주자의 이름을 빙자하여 중국식 풍습에 근거하여 가례(家禮)를 마구 적어 놓은 책이다. 주자(朱子)는 원래 흠 잡을데 없는 인물이었으나, 그 제자들이 그의 명예를 훼손한 대목이다. 


★ 중국(中國)의 문화는 매우 호전적이고 침략적 기질이 강해서, 중국의 가족 문화는 부계(父系) 중심의 가부장적 차별적 가족문화였다. 그러나, 한국(韓國)의 전통 문화는 일단 모계(母系) 사회의 전통이 이어져 왔었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일정 기간 처가(妻家)살이를 해야 했고, 애를 낳고 애가 성장하면 따로 분가(分家) 하는게 전통적인 결혼 문화였다. 한국인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材)를 잘 받들고 사람을 존중하는 기질이 강해서, 한국(韓國)의 전통 문화는 아들. 딸. 친가. 외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가족 문화로서 특히 여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지켜왔다. 그러한 전통은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의 커다란 국란과 무수한 수탈을 겪으면서, 사회 민심이 흐트러지자, 국가적으로 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적 성리학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유교(儒敎) 규범과 중국(中國)의 부계(父系) 중심 풍습이 일반 민초들까지 파고들면서 한국(韓國)의 전통  모계(母系) 가족 문화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 우리나라는 제사(祭祀) 문화의 본 고향이며, 제사(祭祀) 문화는 본래 우리 민족의 세시(歲時)풍속 중 한 갈래였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BCE 3,897-2,333)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배달(倍達 BCE 3,897-2,333)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 시대부터 주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봉행해 오다가 열국(列國,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시대로 이어지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사국(四國) 시대로 이어진다.


★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BCE 3,898-2,333) 민족이다. 배달국(倍達國 BCE 3,898-2,333)의 전통을 이어 받아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의 단군(檀君)은 신선도(神仙道)의 나라를 세우고,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이라는 제천단(祭天壇)을 쌓도록 했으며,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거나 매년 5월 단오제와 10월 상달제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조상신(祖上神)에게 예(禮)를 올렸다.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 10월 상달제는 추수 감사절의 의미로서 삼한(상달제)고구려(동맹, 10월)동예(무천, 10월)로 이어져 왔다. 10월 상달은 1년 중 가장 높은 달이라는 뜻이다. 초순에 술과 떡을 장만하여 삼신 상제님, 성주신, 조상신 등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은 한해 농사에 대한 풍년을 기원하는 5월 단오제, 가을 추수를 감사하는 10월 상달제 형태로 주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5월은 풍년의 기대를 안고, 10월은 추수와 감사의 마음으로 정성껏 상제님과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제사(祭祀)를 올린 것이다.


★ 여자(女子)의 원한(怨恨)이 천지에 가득 차서 천지 운로(運路)를 가로막고 그 화액(禍厄)이 장차 터져 나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멸망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원한(怨恨)을 풀어 주지 않으면 비록 성신(聖神)과 문무(文武)의 덕을 함께 갖춘 위인(偉人)이 나온다 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가 없느니라. 예전에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이 되면서도 항언(恒言)에 ‘음양(陰陽)’이라 하여 양(陽) 보다 음(陰)을 먼저 이르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오! 이 뒤로는 ‘음양(陰陽)’그대로 사실을 바로 꾸미리라.


★ 몇천 년 동안 깊이 깊이 갇혀 남자의 완롱(玩弄)거리와 사역(使役)거리에 지나지 못하던 여자(女子)의 원(寃)을 풀어 정음정양(正陰正陽)으로 건곤(乾坤)을 짓게 하려니와이 뒤로는 예법(禮法)을 다시 꾸며 여자의 말을 듣지 않고는 함부로 남자의 권리를 행치 못하게 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