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제5 문명, 요하(遼河) 문명은 한국 조선족 역사

마도러스 2010. 1. 29. 10:57

 

■ 제5 문명, 요하(遼河) 문명은 한국 조선족 역사

 

■ AD 6천년 한반도-요하(遼河)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일본 강점기까지 ‘만주(滿洲)’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古朝鮮)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 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 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古朝鮮)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滿洲)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東北) 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黃河) 문명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 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黃河) 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양쯔강) 하류에서 하모도 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하모도 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仰韶) 문화 (황하 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양쯔강) 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 문명은 황하 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 기원론이 아니라, 황하 문명장강(양쯔강) 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장강(양쯔강) 하모도 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 문화이다. 이것은 황하 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 요하(遼河) 문명 발견(1980년), 중국은 혼란. 세계는 깜짝

 

장강(양쯔강) 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었으니까! 원래,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黃河) 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만리장성 북쪽 요서(遼西)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시대옥기(玉器) 시대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요하(遼河) 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 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遼東), 요서(遼西), 만주(滿洲)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 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紅山) 문화(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 단계,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 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요하(遼河) 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紅山) 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 단계, 국가 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 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 석기, 마제 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 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 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타제 석기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玉器) 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모순에 빠진 중국 역사, 재편 작업의 동북 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黃河) 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 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 문명의 중심인 황하 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말이다.

 

결국, 중국은 요하(遼河) 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中華) 문명은 요하 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遼河) 일대는 원래 중화 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한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遼河)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 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高句麗) 역사가 중국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東北) 공정 때문에 요즘 말이 많다. 동북 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 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 지역의 모든 소수 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 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神話)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古朝鮮), 단군(檀君),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 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요하(遼河) 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자료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그 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遼河) 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遼河) 상류는 내몽고 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것이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遼河) 문명은 먼저 신석기 문화인 ◎ 소하서 문화(기원전 7,000-6,500년) ◎ 흥륭와 문화(기원전 6,200-5,200년) ◎ 사해(査海) 문화(기원전 5,600~) ◎ 부하 문화(기원전 5,200-5,000년) ◎ 조보구(趙寶溝) 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紅山) 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 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 병용 시대. 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 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 국가 단계로 진입한다.

 

동석(銅石) 병용 시대는 소하연 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 시대인 하가점 하층 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紅山) 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紅山) 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 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 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 동검이 무더기로

 

요하(遼河) 문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紅山) 문화와 하가점-하층 문화이다. 홍산(紅山) 문화는 요하 문명의 꽃이다.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 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 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紅山) 문화가 요하 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 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 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 문화고조선(古朝鮮)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 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 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 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遼河) 지역 중요 신석기 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 한반도 북부와 요서(遼西), 요동(遼東)은 단일 문화권

 

흥륭와(興隆窪) 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玉器)이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玉器)이다. 그런데, 흥륭와(興隆窪) 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 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흥륭와(興隆窪) 문화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 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이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遼西) 지역 흥륭와(興隆窪) 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양쯔강) 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 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興隆窪) 옥(玉)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 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 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 무늬 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 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 지역과 요서(遼西), 요동(遼東) 지역이 하나의 단일(單一)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이다.

 

■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 문화

 

흥륭와(興隆窪) 문화에서 눈여겨 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 시대 집단 주거 지역인 ‘화하 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興隆窪)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 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농경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흥륭와(興隆窪) 문화에서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됐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 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 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 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 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 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7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4,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사해(査海) 문화는 흥륭와 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 문화 또는 흥륭와-사해 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査海)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 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査海) 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사해(査海) 문화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龍)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龍)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 학자들은 ‘중화 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査海) 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 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趙寶溝) 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鳳凰) 문화가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봉황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 학자들은 이를 ‘중화 제일봉’이라고 부른다.

 

■ 요하(遼河) 문명은 독자적인 토기 문화 보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趙寶溝)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仰韶) 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趙寶溝)의 채도는 앙소 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仰韶) 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 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遼河) 문명이 독자적인 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黃河) 문명을 대표하는 앙소(仰韶) 문화의 채도는 서방의 것과 흡사하다. 앙소 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 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그러나, 조보구(趙寶溝)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 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遼河)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한겨레 신문 박종찬 기자, 입력: 2010.01.28)

 

■ 일찍이 북방 바이칼호 부근과 중아 아시아 일대에 세계 최초의 나라, 환국(桓國,BC 7,199-3,897)이 있었고, 그 후, 배달(倍達 BCE 3,898-2,333) 환웅(桓雄)께서 문명 개척단을 이끌고 요동(遼東), 요서(遼西), 만주(滿洲)로 내려와서 토착민인 곰족(熊族). 호족(虎族)들을 회유하였고, 배달(倍達)이란 나라를 세웠다.

 

배달(倍達 BCE 3,898-2,333) 문명에 의해 인류 4대 문명이 잉태된 것이다. 그 후, 배달(倍達 BCE 3,898-2,333) 의 마지막에 이르러 장자(長子)이신 단군(檀君)께서 다시 고조선(古朝鮮,BC 2,333-238)을 세웠고,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인류의 문명은 북방에 위치해 있던 배달국(倍達 BCE 3,898-2,333)의 문명이 인류 4대 문명을 낳아 생겨났다.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요하(遼河) 문명의 사해(査海) 문화 유적지에서  용(龍) 문화(용龍 형상물. 용문 도편)가 나온다. 또한, 요하(遼河) 문명의 조보구(趙寶溝) 문화 유적지에서 최초의 봉황(鳳凰) 문화(봉황 형상 그릇)가 등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용(龍)봉황(鳳凰) 문화가 중국의 것이 아니라, 우리 배달(倍達) 민족 동이족(東夷族)의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