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우리 한민족은 하늘에 천제(天祭) 지내던 민족

마도러스 2009. 6. 25. 15:27

■ 우리 한민족은 하늘에 천제(天祭) 지내던 민족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천손(天孫) 즉, 하늘의 자손으로 불렸다. 하늘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그리움이 어찌나 컸으면 한 나라의 국가(國歌)에도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 즉, 군자국(君子國)으로도 불리는 대한민국. 하늘의 큰 복을 받은 민족이기에 예로부터 외세의 숱한 침략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백의민족(白衣民族). 외세의 압력과 계략으로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했던 그 설움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민족의 역사를 다시 바로잡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첫 번째 걸음으로 ‘원구단(圓丘壇)’에 대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 원구단(圓丘壇)이란?  

 

1967년 7월15일 사적 제157호로 지정된 원구단(圓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며, 일명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녔고,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해 왔다. 하늘의 자손인 우리민족이 오랜 상고시대부터 매년 10월 상순에 국가 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고조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해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이다. 그리고 고조선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는 다 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낸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 지낸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성종 2년(983년) 정월에는 왕이 원구(圓丘)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방위천신(方位天神)과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제사를 드렸다.

 

● 원구단(圓丘壇)의 수난  

 

고려 말 우왕(禑王) 11년(1385년)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儀禮)에 따라야 한다는 친명정책(親明政策) 주장에 의해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 초 제천의례는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서로 엇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년)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년)에 실시된 원구제(園丘祭)는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조선 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년)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황제의 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해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건립지를 선정한 후 단(壇)을 건립했다.

 

광무(光武) 원년(1897년)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圓丘壇)을 쌓았고, 10월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이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오성(五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오악(五岳). 사해(四海). 명산(名山). 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사(雷師). 오진(五鎭). 사독(四瀆). 대천(大川). 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그들은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圓丘壇)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 (현재 조선호텔)을 지었다. 현재 이곳에는 황궁우(皇穹宇)와 돌로 만든 북인 석고(石鼓) 3개가 남아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올댓 뉴스 백승인 기자, 입력: 2009.06.02)

 

 

● 우리 민족은 천제(天祭)를 드려온 천손(天孫)

 

 

우리민족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과 생각은 종교와 서양문물에 의해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우리 민족은 천손(天孫)이다. 우리 민족은 천제를 드려온 천손(天孫)이다. 하늘과 통하는 민족이다. 하나님을 향해 하늘에 기도를 하고 소원을 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천손(天孫)이자 인류의 장자(長子)인 우리 민족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인간이 하늘과 땅에 보답하고, 바라는 바를 지구상에 이루겠다는 것이 천제(天祭)로 나타난 것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을 위해 둥근 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고, 하늘의 뜻을 동서남북 사방의 땅 위에 건설하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원구단(圓丘壇)에서 천제를 지내면서 바랐던 뜻이다.

 

우리 민족은 광명이세(光明理世) 밝은 빛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민족이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가진 민족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써 다스리려 하였고, 이도여치(以道與治) 도道로써 세상을 다스리여 하였다.

 

내 안에 있는 안테나를 하늘에 맞춰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국조(國祖)단군(檀君)이다. 외세에 의해 신화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단군 왕검의 존재는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단군은 어떠한 존재인가. 마니산 태백산에는 단군이 쌓은 제단이 있다. 단군은 그가 쌓은 제단에서 천제를 드린 제사장이자 인간을 치리하는 왕이었다. 단군(檀君)은 일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