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태극기(太極旗) 제작의 유래 및 역사

마도러스 2008. 12. 26. 02:59

■ 태극기(太極旗) 제작의 유래 및 역사

             

태극(太極)은 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근원을 상징한다. 지금까지 국내 최고(最古)의 태극 문양은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목제품 태극 문양(600년경)이다. 그리고, 지금의 태극기와 비슷한 태극 모양과 4괘 도형은 1392년 고려말 공양왕 때 제작된 범종(梵鐘)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었고, 다만 특유의 문화 양식으로만 사용되는 도형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태극기가 대외적인 국가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1882년의 일이었다. 1882년 고종(高宗) 황제께서는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朴泳孝)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시고 지시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로써 태극기가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국가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다. 

 

1882년 고종 황제께서는 수신사 박영효를 일본으로 파견하면서 대외적으로 태극기를 처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1882년에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아 태극기의 역사가 단절되어 왔었다. 일제 침략 36년 동안 처절한 압박과 함께 천태만상의 변형된 태극기를 사용되었다. 그 후, 1949년 10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제정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역사학계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1997년 8월 8일 동경 도립 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관련 기사가 게재된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를 발견하여 1997년 광복절에 공개함으로써 115년 만에 그 실체를 역사의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최초의 태극기가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창안. 도안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었다. 그러나,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時事新報)가 발견됨으로써 최초의 태극기 고종(高宗) 황제가 직접 그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고종(高宗)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朴泳孝)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했던 내용들이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박영효(朴泳孝)의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 부분 5분지 2를 중심 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 숙소 (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림으로써 국왕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 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사용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1882년 사용한 태극기는 1392년 고려말 공양왕 때 제작된 범종(梵鐘)에 새겨져 있는 태극 모양과 4괘 도형이 대부분 일치한다. 고종 황제는 태극기를 새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태극 모양을 그대로 대한제국 국기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고려말 공양왕 때 제작된 범종의 태극기는 높이 35cm, 직경 30cm로써 고종이 그려낸 태극기와 같은 형식이다.

 

1883년 01월 27일 고종 황제께서는 태극 4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국기(國旗)로 사용한다고 왕명으로 공포하였다. 당시의 태극기는 4괘의 위치가 지금과 동일 하지만, 태극의 음양 모양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태극의 음양 배치가 위. 아래로 되어 있지 않고 좌. 우로 되어 있었는데, 좌측은 빨강색이고 우측은 파랑색이었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에 걸려 있는 태극기도 음양 배치가 위. 아래로 되어 있지 않고 좌. 우로 되어 있으며,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 당시 중앙청에 내걸린 태극기도 음양 배치가 위. 아래로 되어 있지 않고, 좌. 우로 되어있다.

 

1949년 국기 제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1949년 3월 25일 음양(陰陽) 배치를 확정한 후에야 지금과 같은 태극기의 태극 모양이 확정된 것이다. 태극기의 국기 봉도 우리나라의 꽃인 무궁화 봉오리를 상징한 것으로 하고, 색깔은 국기 깃 면의 색깔과 조화를 이루도록 금색으로 하도록 하였으며,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告示) 제2호로 공포함으로써 우리나라 태극기는 완전한 통일 규격으로 자랑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中國)은 오성홍기(五星紅旗)를 사용하는데, 1949년 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결정됐다. 국기(國旗) 결정 연대가 우리나라 보다 매우 늦다. 붉은 바탕(혁명)에 황색(황인종)으로 된 큰 별 하나(공산당)와 작은 별 4개(노동자. 농민. 민족자산. 도시소자산 계급)가 왼쪽 윗부분에 배치된 도안이다. 원래, 중국은 우리 나라 태극기를 가지려고 했다. 이유는 태극기가 우주 만물의 음양(陰陽) 법칙을 상징하고 있고, 음양(陰陽) 법칙이 곧 이 세상 모든 생명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 태극기를 가지려고 했지만, 국제적으로 태극기가 한국 국기(國旗)로 공식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민족이다. 그래서,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의 신교(神敎) 문화를 알아야 한다. 동시에,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 정신을 청명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 배달 민족의 문화는 상제(上帝)님을 모시고 조상님께 제사(祭祀)를 지내는 신교(神敎) 문화이다.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이후, 우리나라는 점점 중국의 속방(屬邦)으로 전락해 버렸다. 결국,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高麗) 충렬왕 때 황제(皇帝)의 지위에서 (王)의 지위로 호칭이 격하되었다. 천자국(天子國)의 천자(天子)로서 상제(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는 의식도 중국의 억압에 의해 올리지 못 하였다. 하지만, 천자국(天子國)의 위상을 되찾고 황제(皇帝) 지위를 회복하려는 비장한 시도를 조선(朝鮮) 고종 황제께서 하셨다.

 

고종 황제께서는 1897년 상제(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는 원구단(圜丘壇)을 짓고, 왕(王)의 호칭을 황제(皇帝) 폐하로 바꾸고 나라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 중국식이 아닌 자주적인 광무(光武)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태극기(太極旗)를 제작하여 대외적인 상징으로 삼았고, 애국가(愛國歌)를 만들어 국가의 공식 행사에 사용토록 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최초의 애국가는 ‘하나님’이 아닌 ‘상제(上帝)님’을 간구했었다. 천자국(天子國)의 위상과 배달(倍達) 민족의 신교(神敎) 정신을 표방하고자 하였다. 최초의 애국가는 ‘상제(上帝)님’을 간구했었지만, 나중에 기독교의 영향으로 ‘하나님’이란 단어로 바꾸어져 버렸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은 인류 최초의 나라와 문명을 건설했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 의한 상고(上古) 역사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버렸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민족의 신교(神敎) 정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의 신교(神敎) 문화를 알아야 한다. 결국, 배달(倍達) 신교(神敎) 문화를 계승하고 우리 민족의 뿌리 문화인 상제(上帝)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