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축구 응원단 상징 '붉은 악마', 치우 천황(天皇)

마도러스 2009. 5. 20. 13:48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는 치우 천황


한국 국가대표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는 언제나 도깨비 문양이 그려진 휘장을 걸고 나온다.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蚩尤) 천황이다. 최근 중국에 출시한 한국 온라인 게임 ‘패온라인’에 나오는 치우 천황이 한국계로 묘사되자 중국 네티즌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왜 중국 조상을 한국으로 왜곡하나”고 들끓고 있는 바로 그 치우 천황이다.


중국의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치우 천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짐승의 몸으로 말을 하고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했으며 모래를 먹고 칼, 창, 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만들어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蚩尤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組立兵仗刀戟大弓 威振天下). 공안국이 말하기를,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불렀다(句黎君號蚩尤).”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치우(蚩尤) 천황은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통일하여 신교(神敎) 문화권으로 통치한 최초의 천자(天子)이다. 치우 천황(蚩尤天皇)은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환웅(桓雄)으로 B.C2,707년에 즉위하신 분이다. 그 무렵,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軒轅, B.C 2,692~2,593)은 동방 배달국의 천자(天子)로부터 독립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치우(蚩尤) 천황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배달국의 일개 제후(諸侯)였던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탁록(?鹿)의 대결전이 전개되었는데, 치우천황(蚩尤天皇)은 황제 헌원(軒轅)을 제압하고 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하였다.


『환단고기』의 삼성기(三聖記)에서는 치우천황(蚩尤天皇)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또 수대를 내려와 치우천황(蚩尤天皇)이 계셨는데, 이 분은 용맹이 매우 뛰어나고,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썼으며 능히 큰 안개를 일으켰다. 특히 구치(驅馳)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어 내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제작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그를 외경(畏敬)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분을 치우천황(蚩尤天皇)이라고 불렀는데 치우(蚩尤)란 말은 속언(俗言)으로 뇌우(雷雨)를 일으켜 산하를 뒤바꾼다는 뜻이다. 치우 천황(蚩尤天皇)께서 염제(炎帝) 신농(神農) 국가의 마지막 후예인 8대 임금 유망(楡罔)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웅도(雄圖)를 품고 여러번 서쪽으로 진출하여 용감무쌍한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색도에 군사를 진군시켜 회수와 태산(泰山) 사이를 점령하였다. 그 후에, 유망(楡罔)의 뒤를 이은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 즉시 탁록(?鹿)의 광야로 진격하여 황제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신시본기』를 보면 지금의 북경(北京) 서북에 위치한 탁록(?鹿)에서의 대결전이 마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유망(楡罔)이 치우천황(蚩尤天皇)에게 대패하여 공상(하남성 진류)으로 도망가자,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이를 일거에 제거해 버렸다. 이 후에, 유망(楡罔)의 뒤를 이은 중국의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대군(大軍)을 일으켜 치우(蚩尤) 천황에게 대항해 왔다. 이로써 배달국의 치우(蚩尤) 천황과 중국의 황제(黃帝) 헌원(軒轅)과의 대결전(大決戰)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대 동북아의 국제 질서 개편 가늠질한 이 대전쟁은 당시 10년간 73회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고, 장군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며, 군사들은 불퇴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蚩尤) 천황은 그 법력이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지었다고 한다. 탁록(?鹿)의 싸움에서는 황제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의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해 방향을 가리키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싸웠다. 이때 치우천황(蚩尤天皇)의 장수가 급공을 하려다 오히려 진중(陣中)이 몰살당하였고, 이에 노기충천한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비석(飛石)박격기(迫擊機)'를 최초로 제작하여 황제헌원의 군사들이 항전을 못하게 만들었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세속에서 부르는 별칭이고, 본래는 자오지(慈烏支) 환웅이다. 사기, 관자, 서전 등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치우(蚩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때의 사건을 중국『사기(史記)』에서는 ‘금살치우(禽殺蚩尤)’ 즉 헌원(軒轅)이 치우천황(蚩尤天皇)을 사로잡아 살해했다. 그리고,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亂)을 일으켰다고 역사의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왜곡 날조하였다. 배달국(倍達國) 시대 최대의 역사적 사건을 왜곡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제후(諸侯)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軒轅)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蚩尤)천황에게 도전해 온 것이다.


그래서,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사기(史記), 헌원기(軒轅記) 등의 기록에서는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머리에 최초로 철두갑(鐵頭鉀)을 만들어 써서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동두철액(銅頭鐵額)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4700년전의 배달국(倍達國) 시대에 이미 청동기 시대에 들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경기장과 거리에 온통 붉은 물결로 장식되는 도깨비 형상의 “붉은 악마”가 고대사(古代史)에 등장하는 배달국(倍達國) 치우(蚩尤) 천황(天皇)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우 천황은 중국 민족의 시조(始祖)인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제압하고 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한 배달국(倍達國)의 14대 환웅(桓雄)이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축구 응원팀이 1999년부터 선보인 붉은 악마의 이미지는 중국인들이 동이족(東夷族)인 치우(蚩尤)천황을 비하(卑下)하여 도깨비의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치우(蚩尤)천황은 고대(古代) 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한 배달국의 제14대 환웅(桓雄)을 말한다. 치우의 용맹이 하늘을 찌를 듯해서 중국의 한족은 치우를 군신(軍神)으로 받들게 되었다. 그런데, 왜 중국 사람들은 치우 천황을 붉은 악마 즉 악마라는 비하 칭호를 붙였을까? 결론은 “치우 천황은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배달 민족)의 조상이기 때문에”라는 이유에서이다.


한편, 구려(句黎)족 가운데 동이족은 동쪽으로 갔고, 그 다른 일파가 남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일파를 묘족(苗族)이라고 한다. 묘족은 중국의 집시라고 불린다. 기원전 아득한 옛날에 정주지를 잃은 이래 대륙을 떠돌면서 살았다. 묘족의 문화에 대해 중국 사서에는 “술과 노래, 춤에 능하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여자들이 노동에 종사한다”고 묘사돼 있다. “상투를 트는 민족은 동이와 묘족 밖에 없다”는 기록도 있다. 여성들은 긴 머리를 땋고 둘러 가채머리로 장식했다.


세월이 지나 21세기를 맞은 지금, 묘족은 중국 운남성과 광동성, 귀주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다. 중국 최남단 하이난(海南)성의 민속촌에서 그 묘족들의 모습을 목격된다. 이들은 치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민족이다.

 

묘족의 전설에 따르면, 치우 천황 셋째 아들이 이끌던 부족은 지금의 장시(江西)성 일대에서 거주했다. 치우 천황의 셋째 아들은 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대륙을 이리저리 떠돌던 묘족은 심지어 바다 건너 해남성까지 찾아들어 살고 있다.


하이난성 민속촌의 묘족은 차력사들이 종종 공연을 한다. 묘족 사람들은 마치 치우 천황을 묘사한 그대로, “모래를 먹고 칼, 창, 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휘두르는” 흉포한 모습이다. 차력 공연이 끝나면 산발한 머리는 곱게 상투를 튼다. 산산조각난 유리병 위를 맨발로 걷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조각을 혀로 핥고, 그리고 기름 잔뜩 머금은 입으로 불방망이를 삼키며 불을 내뿜는다. 중국의 여느 소수민족이 가지고 있는 부드럽고 소박함을 상징하는 내용은 일체 없다.


그들의 옷 차림새와 풍습을 보고 한국 관광객들은 묘한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공연이 끝나면 차력사들은 산발한 머리를 곱게 묶어 상투를 튼다. 산발을 올려서 가채머리처럼 고운 장식으로 마무리 짓는 여인들도 자주 볼 수 있다. 묘족이 기록한 치우만가(蚩尤挽歌)는 아래와 같다.


千古奇才横空贤. 천고의 세월 영웅 치우 천왕은

可堪并论炎黄间. 염제와 황제와 더불어 이야기 하리

五兵刑法君始点. 다섯 무기와 형과 법이 치우로 시작했으니

九黎生气冲云天. 구리 백성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남는도다

席卷中原华夏联. 염제와 황제를 누르고 중원을 석권하니

血染江河五千年. 5000년 강물을 피로 물들였네

英名不因涿鹿败. 영웅의 이름이 탁록 패전으로 말미암지 않으니

老黑石山百花鲜. 흑석산 온갖 꽃들 여전히 붉네


묘족은 해마다 음력 10월이면 치우 제사를 지낸다. 치우 천황의 셋째 아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결국 중국 남쪽 해남성 산록에서 살고 있다. 해남도에서 만난 묘족은 여전히 치우의 기세를 유전하여 여타 중국 소수 민족과 다른 문화를 보존하며 살고 있다. (자료 참조 - "붉은 악마의 휘장에 있는 도깨비 문양의 정체" 박종인)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과거 역사와 미래 문명의 비젼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 (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堯)임금. (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