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추석(秋夕)과 성묘(省墓)의 유래 및 역사

마도러스 2008. 9. 16. 17:02

■ 추석(秋夕)과 성묘(省墓)의 유래 및 역사

 

추석(음력 8.15)에 성묘(省墓)하는 것은 중국 민족에게는 찾아 볼 수 없고, 고대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다. 우리 민족의 추석은 고대 시대부터 달(月)에 대한 신앙에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 있어 날마다 세상을 밝혀 주는 태양은 당연한 존재로 여겼지만 한 달에 한번 만월(滿月)을 이루는 달은 고마운 존재였다.

 

고대 사회에서 어두운 밤은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만월(滿月)은 인간에게 있어 고마운 존재였고, 그 결과 만월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만월의 밤중에서도 일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8월 15일인 추석이 가장 큰 명절로 여겨진 것은 추수 감사의 제사(祭祀)풍습으로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가을 추수와 함께 만월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고 먹고 마시고 놀면서 춤추었다.

 

신라(新羅) 유리왕(재위 AD 24~57년)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부르게 하였고, 여러가지 산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가 일으킨 산업의 한가지로 유명한 것은 길쌈이었다. 유리왕은 길쌈 장려를 위해 6부의 부녀자들에게 내기를 시켰다. 우선 6부의 모든 부녀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궁중의 왕녀 두 사람을 뽑아 두 패를 각각 거느리게 한 다음, 해마다 7월부터 한 달 동안 베를 짜게 하고 8월 보름이 되면 어느 편이 더 많이 짰는지를 심판하였다. 그래서 7월이 되면 부녀자들은 두 왕녀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베를 짜기 시작했고, 임금하고 마침내는 저마다 마음을 졸이며 그동안 짜 놓은 베를 가지고 내기 장소에 나왔다.

 

유리왕과 왕비를 비롯한 궁중의 관리들이 나와 유리왕이 판결을 내리면 이긴 편에서는 환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진편에서는 그동안 별미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하였다. 맛있는 송편, 기름에 지진고기, 전 등 갖가지 별식과 밤, 대추, 머루, 다래, 배 등이 푸짐하게 마련되면 양편은 모두 동그란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 어두워 지면 하늘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냈다. 이 때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다 했는데 이를 "가배(嘉俳)"라 했다. 이 "가배"가 오늘날 “한가위”라는 뜻의 “가위”에 해당하는 한자의 음차 표기이며, 음력 8월 중간 "중추"의 우리말 표기이다. 즉, “한가위”는 한"이라는 "크다"라는 뜻과 "가위"라는 가운데라는 뜻이 모여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다. 한가위는 가족들이 모여 추수가 풍성하게 된 것을 감사드렸는데, “추수한 것이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고 하였다.

 

가야(伽倻)에서도 추석은 중요한 명절이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에는 매년 정월 3일·7일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추석)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奠)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추석 성묘는 우리 민족의 효심(孝心)이 만든 독특한 풍습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조상님이 돌아가신 기제(忌祭)에 드리는 제사와 함께 명절날 제사(祭祀)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정월 초하루의 설 차례, 한식날의 성묘, 백중에는 제사 지내고, 추석, 음력 3월 3일, 9월 9일 등의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 제사를 지냈다. 서양의 명절과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인데, 명절날 제사는 단순히 먹고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생사(生死)가 둘이 아닌 조상의 얼을 되새겨 조상님과 후손이 함께 경건하게 치르는 차례의 문화였다.

 

추석은 설날. 단오와 함께 우리 나라의 3대 명절의 하나였다. 추석이 되면 한더위도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철로 접어든 때이다. 추석 무렵에는 넓은 들판에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 빛으로 물들며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 추석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었던 만월(滿月)의 명절이다. 달의 고마움에 감사하고 달을 위했으며 떡을 해도 달떡을 했다. 달을 의식하는데 있어 우리 민족은 송편이라 해서 반월형의 떡을 해서 먹었다. 달에게 소원을 비는 민간신앙을 가지면서 반월을 채택한 것은 반월이 일일성(日日盛)하므로 발전의 상징으로 본데서 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의 도성(都城) 이름에 반월성이 많은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당(唐)에 유학하던 일본 승려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行禮記)”에 당나라 산동 지역에 사는 신라인들과 신라인의 풍습과 관련된 기록이 나오는데, “당 문종 개성(開成) 4년(839년) 8월 15일 신라인은 수제비와 떡을 장만하고 8월 15일 명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유독 신라에만 있다. 백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악기를 연주하기를 밤과 낮을 쉬지 않고 사흘이나 계속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순암 안정복(安鼎福)“3월 상순의 벌초는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에서 비롯되었지만, 한식(寒食)에 묘소에 참배하고 추석에 벌초하는 것은 중국의 풍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안정진(安正進)에게 말한 대목에서 처럼 추석 성묘는 중국에는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풍속이다. 인조 반정 이후,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 추석 성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중국에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며, 사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당대의 당연한 발상이었다.

 

성묘(省墓)는 설날, 추석, 한식 등의 명절에 집에서 차례를 모시고 나서 가족들과 함께 조상의 묘가 있는 곳으로 성묘(省墓)를 간다. 물론 그날 이외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집에서 조상님께 차례를 모시는데 산소에까지 가서 다시 성묘를 한다. 성묘(省墓)란 말 그대로 묘를 살핀다는 의미이다.

 

신라 말, 당시 승려이자 풍수지리학자였던 도선(道詵) 대사는 왕융(王隆,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에게 어느 곳에 집을 지으면 장차 왕이 될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왕융이 그곳에 집을 지었는데 그 뒤 왕건이 태어났고,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이후 왕건은 고려(高麗) 왕조를 일으켰다.

 

그 이래로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높아지면서 도선의 풍수지리를 신주 모시듯 모셨고 집집마다 명당자리에 조상묘를 쓰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좋은 자리가 있으면 이미 묘가 들어 있는데도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묘를 쓰고 또 쓰는 등 투장偸葬이 성행하였다. 이 때문에 후손들은 자손된 도리로서 마땅히 자기 조상님의 묘가 무사한지를 수시로 가서 살펴보며 수호했다. 그 후 성묘(省墓)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옛 중국 기록을 보면, '예(禮)를 잃어버렸다면, 동이(東夷) 풍습에게서 구한다.' 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동이(東夷) 민족인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예(禮)를 중시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었다. 우리나라는 제사(祭祀) 문화의 본 고향이며, 제사(祭祀) 문화는 본래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 중 한 갈래였다. 우리 민족은 배달(倍達 BCE 3,897-2,333) 민족이다. 우리민족은 환국(桓國 BCE 7,197-3,897), 배달(倍達 BCE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을 건국하였고, 배달(倍達 BCE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의 풍습은 열국(列國,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시대로 이어지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사국(四國)시대로 이어진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는 중국 동부 지역에 요(堯), 순(舜), 하(夏), 은(殷). 주(周) 나라를 건국하였는데, 이들 나라에 우리 민족의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중국 지역에서는 요(堯), 순(舜) 시대에 천신(天神), 지기(地祇), 5악(嶽), 4독(瀆)을 제사한 기록이 있고, 조상 숭배가 크게 성행하여 조상에 대한 제례가 하(夏), 은(殷). 주(周) 나라에 걸쳐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