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대한민국 국새(國璽)와 용(龍). 봉(鳳)

마도러스 2007. 9. 18. 19:14

■ 대한민국 국새(國璽)와 용(龍). 봉(鳳)

 

나라를 대표하는 인장(印章)을 국(國璽)라고 부른다. 국새(國璽)는 나라를 상징하기도 하기도 했으며, 국력에 따라 모양과 형식이 달라지기도 했다. 국새(國璽)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북부여(北扶餘. BC 239-58))의 후손인 낙씨 부여 예왕(穢王) 예왕지인(穢王之印)이란 국새를 사용한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예고새인조(禮考璽印條) 부여(扶餘)의 예왕(濊王) '예왕지인(濊王之印)'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국새(國印)이다. 중국에서는 춘추 전국시대를 평정한 진시황(秦始皇, BC 246 즉위)이 옥으로 임금 도장을 만든 것이 처음이다.

 

 국새(國璽)의 모양과 형식이 변천해 온 과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의 고대사를 이해해야 한다.  BC 238년에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 망하면서부터, 중국 한족(漢族)의 중화(中華)세력은 대륙에서 힘을 얻기 시작하였고, 우리 배달민족의 선민(選民) 광명사상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일부를 점령하여 중국과 겨뤄 볼만하기도 했었지만, 차츰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고구려(高句麗, BC 58-AD 668)는 수나라와 당나라와 싸워서 그들을 패퇴시키기도 했었다. 백제(百濟, BC 18-AD 660)는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중국 동북부 및 남부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담로(擔魯)’라는 통치 기구를 두고 통치하던 해상 대제국이었다. 663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부터는 중국의 중화(中華) 민족에게 배달의 선민(選民) 광명 민족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힘없이 중국을 섬겨야 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등장하게 된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였다.

 

 661 09, 백제 왕자 부여풍이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주류성(周留城, 부안군 상서 위금암 산성)을 수도로 하는 백제 부흥국을 다시 세웠다. 그 후, 663 3, ()나라의 병력 2 7천명과 전함 1,000척의 지원을 받아 나당 연합군과 싸우는 백촌강 (동진강) 전쟁이 벌어졌다. 동북 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던 "백촌강 전쟁"에서 백제.왜군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마저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만다. 당나라의 대외 전략이 승리하는 날이었다. 결국 이 때부터, 배달의 광명민족은 중국 중화(中華)민족의 그늘 속으로 파묻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힘없이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중국과는 겨뤄 볼 엄두조차 해내지 못했다.

 

 고려(高麗) 초 에는 중국 대륙에 강력한 군사대국이 없었고, 역사상 최고 약체라고 하는 송()나라가 있었기에 고려 초기에는 중국의 침략을 별로 받지 않았다. 그 후, 고려(高麗)는 만주 요()나라, 몽골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조선(朝鮮)은 건국 직후부터 중국 대륙에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명()나라가 등장하여 사대주의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조의 정권과 나라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중국 대륙에 청()나라가 등장한 이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중국과 싸워봤자 이길 수 없고 커다란 피해를 보기 전에 일찌감치 엎드려서 사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주적 제후국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중국에게 흡수되어 자주력이 말살되었던 다른 제후국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유독 우리만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이다.

 

 국새(國璽)의 모양과 형식이 변천해 온 과정은 국력의 변천 과정이었다. 고려(高麗) 시대에는 요(() 등이 임금에게 금인(金印)을 보내 왔고, ()나라에서는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駙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의 도장을 보내 왔으며, 1370(공민왕)에는 명()나라에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 왔다. 그 후, 옥새는 중국으로부터 하사를 받아오곤 했다. 그런데, 이것이 관행으로 굳어진 것은 조선(朝鮮) 왕조 시대였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역성 혁명에 성공한 조선 왕조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명나라에 옥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옥새의 꼭지에 새겨진 동물은 거북이였다. 거북이는 황제가 변방의 제후에게 내려주던 도장에 새겨진 영물로 '복종'을 뜻 하는 것이었다.

 

 1897 10, 고종 임금은 나라이름을 "대한 제국"(大韓帝國)이라고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자주성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1897년 제작한 '나라의 도장' 국새(國璽)는 민족의 자주성을 위해 용을 상징물로 썼다.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용을 상징물로 생각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1945 해방 이후, 1949 05 05 국새(國璽) 규정을 새로 공포하고 '대한민국지새'라는 한자로 쓰여진 국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 1963 01, 다시 새로운 국새를 만들었다. 그런데, 1949년 만든 국새와 1963년 새로 만들어진 국새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북이는 중국에서 황제가 변방의 제후에게 내려주던 도장에 있는 영물. 상징적으로 '복종'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99 02,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대한민국 국새(國璽)를 다시 제작하였다. 기존의 국새가 1 6천여 회에 걸쳐 사용돼 마모가 심할 뿐 아니라 인문(印文)의 서체가 한자 전서체를 모방했고, 한글의 독창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훈민정음체 한글 국새를 새롭게 만들었다. 행정자치부가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새로 제작했다. 그 후, 1999 02월부터 중요 외교 문서, 훈장. 포장증, 국가공무원 임명장 등 각종 공문서에 사용하고 있다. 1999년 당시 처음에는 () 형상을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에 부닥쳤다. 기독교 종교 단체의 강한 반발에 부닥친 것이다. 관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며, "하필이면 전형적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을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에 넣느냐"며 반발했다. 서양에서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인류 최후의 날에 나타나는 괴물이 용()을 닮아 있어 용()을 사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종교는 천주교, 이휘호 여사, 김정길 당시 행자부장관, 실무 책임자였던 김재철 당시 행자부 의정국장 등은 기독교였다. 결국, 1999년의 국새는 봉황(鳳凰) 형상으로 결정되었다.

 

 2005 09, 6년간 사용된 국새에 심한 균열 등의 문제가 생겼다. 국새에 생긴 균열이 심각해 나라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으로서는 부적합하며, 국새(國璽)의 손잡이 부분이 두 마리 봉황으로 되어 있는 것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새 손잡이 부분에 조각된 두 마리 봉황(鳳凰)이 자주 독립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역사적으로 황제의 문장이 용()이었던 반면 제후왕의 상징은 봉황(鳳凰)이었다. 청와대가 봉황(鳳凰)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대통령을 제후의 지위로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국새에도 봉황이 아닌 용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통의 국새는 몸체 하나에 머리 하나가 원칙이었는데, 지금의 국새에 달린 두 마리 쌍봉은 여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약해서 왕의 상징으로 용()을 쓰지 못하고, 한 단계 아래인 봉황(鳳凰)을 썼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봉황(鳳凰)은 용()보다 지위가 한 단계 높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하늘을 받들었기 때문에, 하늘과 우리를 이어주는 봉황(鳳凰). 삼족오(세발 까마귀)를 숭상했다. 그 증거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 태양 속에 있는 세발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나 전통 마을 입구 마다의 영역 표시인 장승 솟대 등이 그렇다. 솟대의 새 모양은 봉황. 삼족오(세발 까마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결국, 국새(國璽)의 손잡이 부분을 봉황(鳳凰)으로 결정하여 훈민정음체 한글 국새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봉황(鳳凰)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은 하늘을 잘 날지 못한다. ()은 승천의 꿈을 꾸지만, 봉황(鳳凰)은 실제로 하늘을 날며 세상을 본다. 백제(百濟)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의 꼭대기의 새가 봉황 또는 천계(天鷄) 라는 사실이 우리나라가 봉황을 신성시 여겼음을 입증해 준다. 1999년 청와대에서 나라의 도장으로 제작한 국새(國璽)의 손잡이에 조형된 봉황(鳳凰)은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에 있는 봉황을 모델로 제작했었다. 조선(朝鮮)시대 경복궁(景福宮) 천정에도 봉황 무늬가 있고, 현재 청와대 건축물에도 대통령을 상징하기 위해서 봉황 무늬가 있다. 봉황은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 많이 남아있는 고구려 벽화에 사신도에도 봉황인 주작(朱雀)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금관(金冠)에도 봉황이 들어가 있다. 통일신라 왕실도 용() 보다는 주작(朱雀)을 더 많이 선호했다.

 

 서양에서도 봉황은 매우 높은 대접을 받고 있다. 불사조(phoenix)의 의미로 로마 제국 황제의 휘장이 봉황이었다. 중국에서도 천자(天子)의 궁문(宮門)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에 장식하여 봉거(鳳車) ·봉련(鳳輦) ·봉여(鳳輿)라고 하였다. 천자의 도읍인 장안(長安)을 봉성(鳳城),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 하여 천자를 미화하는 상서로운 상징으로 여겼으며, 나아가서는 모든 경사스러운 일에 봉자(鳳字)를 썼다. 원래 용()은 가장 높은 신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좌하는 자리를 뜻한다. 우리 한민족(韓民族)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체로 봉황(鳳凰)을 용() 보다 더 중요시 했다. 봉황(鳳凰)에서의 봉() '새 중의 새'를 뜻하며, () '배달국의 임금() '를 뜻한다. 중국에 황제가 나타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부터이다. '진시황' '시황(始皇)'은 처음으로 황제가 나왔다는 얘기이다. 진시황 이전에는 배달민족의 나라, 즉 배달국, 고조선의 임금이 황제였다. 그래서, ()자는 '배달나라의 왕'을 뜻하는 '白王' 을 쓴 것이다. 중국의 옛날 역사책에는 배달민족은 백민(白民)으로 나온다. 밝달(밝은 땅), 박달, 백달, 배달의 변천을 통해 배달(倍達)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봉황(鳳凰)' '새 중의 새, 배달나라 임금()의 새'를 뜻하는 일이고, 지금도 대한민국(大韓民國) 청와대의 상징문양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봉황(鳳凰)과 용()은 둘 다 우리 민족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에서 상서롭게 여기던 동물의 상징이다. 그런데, ()에는 암수 구별이 없지만, 봉황(鳳凰)의 경우는 암수 구별이 있다. ()은 수놈이고, ()은 암놈이다. 봉황이라고 하면, 수놈과 암놈을 모두 싸잡아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봉황의 새끼를 봉추(鳳雛)라고 한다. 봉황(鳳凰)은 주로 오동나무에 서식하며, 특히 대나무 열매를 좋아하며, 깨끗한 샘물을 마시고 산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민간인들은 봉황’(鳳凰) 동방 군자의 나라, 배달(倍達)에서 나왔으며, 사해(四海) 밖까지 난다 고 하여 신성시하였다. 그리고,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정된다고 믿었다. 한편, 중국(中國)의 한족(漢族)은 동이족(東夷族)의 상징인 봉황(鳳凰)을 깎아내리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족(漢族)의 용()을 황제 상징이라 칭하였고, 동이족(東夷族)의 봉황(鳳凰)을 제후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봉황(鳳凰)은 지상과 천상을 잇는 신조(神鳥)로서 배달민족의 숭배 대상이었기에 중국의 한족(漢族)은 한편으로 경배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 한족(漢族)의 용() 보다 아랫 단계로 취급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봉황을 용() 보다 아랫 단계로 취급했던 것은 중국인들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의 용() 문화도 알고 보면, 우리 민족의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에서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BC 2,692-2,593)에게로 전파된 것에 불과한 것을 알면, 그것은 우스운 일에 불과하다. 중국(中國)에서 우리 민족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부른다. 동쪽 오랑캐라는 뜻인데, 우리 한민족(韓民族)을 깎아내리는 행위인데, 이것 또한 그들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릇, 동이족(東夷族)은 중국 문화의 뿌리요, 문명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인류 문명의 뿌리와 중국 한족(漢族) 문화의 뿌리가 모두 동방 배달국과 고조선에서 전해진 고대 신교(神敎)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 (). () 등의 중국 건국(建國) 시조(始祖)는 전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임금. ()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 (). ()의 건국 시조는 100% 배달 혈통인 것이다. (). (). () 때까지는 중국에 한족(漢族)의 존재가 없었고, (). (). ()의 시대가 지나고, 춘추 전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한족(漢族)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진()나라의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의 남부 지방을 통일하고, () 유방(劉邦)이 드디어 중국을 완전 통일하면서 중국의 한족(漢族)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역사는 춘추 전국시대부터 시작되고, 한족(漢族)의 역사는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다. 춘추 전국시대 이전의 하(). (). ()의 시대는 배달민족이 나라를 건국하였으므로 배달 민족인 한국의 역사인 것이다. ()나라 무제 때의 사관이었던 사마천(司馬遷)은 황제 헌원 이전의 유명한 인물이 모두 동이족(東夷族)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사기(史記)라는 역사 책에서는 황제 헌원(黃帝軒轅)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였다. 동이족(東夷族) 강태공(姜太公)은 나중에 제()나라의 왕이 된 후에도 배달국(倍達)의 신교(神敎) 문화를 중국의 한족(漢族)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는 배달국(倍達)의 신교(神敎)와 삼신관(三神觀)을 중국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중국 제()나라에서는 팔신제(八神祭) 풍습이 있었는데, 팔신제(八神祭)는 팔신(八神)에게 제사지내는 제천 의식이다. 여기서, 팔신(八神)은 삼신(三神.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 치우(蚩尤) 천황(天皇), 천지일월(天地日月)을 말한다. 청구(靑丘) 배달(倍達)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은 배달국(倍達)의 도읍지를 청구(靑丘)로 옮기고, 동방 최초로 청동기 국가 문명을 내놓았다. 그 후, 900년간 중국인들은 배달국(倍達)의 신교(神敎) 문화와 배달국(倍達國) 치우(蚩尤) 천황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모셨다.

 

 중국의 용() 문화는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인 황제 헌원(BC 2,692-2,593)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 문화는 그 이전에 한민족(韓民族)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에서 최초로 시발되었고, 그것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은 청구(靑邱) 배달국(倍達國)의 치우(蚩尤) 천황으로부터 변방의 자치정부의 황제로 임명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배달국의 치우(蚩尤) 천황으로부터 독립하고자 군사를 일으켜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10년간 73회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결국 배달국 치우 천황이 승리했고, 고대 동방에서 벌어진 최대 전쟁이었다. () 항우와 한() 유방이 5년간 72회 전쟁을 치룬 것보다 규모가 컸던 전쟁이었다. 중국에서의 () 문화는 황제 헌원 때부터 숭상되기 시작하였고, 황제 헌원 때부터 용()의 문화가 중국의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중국의 청동기 문화의 출발도 역시 동방 배달국(倍達)의 청동기 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청구 배달(BC 2,707-2,333) 시대를 창도한 배달국(倍達國)의 제14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은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 머리에 무쇠 이마)의 투구를 하여 만주 일대를 석권하였다. 청구 배달국(倍達)의 문화를 일명 용산(龍山) 문화라고 하는데, 청구 배달국의 용산(龍山) 문화는 나중에 중국의 문화가 출발하는 모태가 된다. 중국의 하(,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나라의 문명도 알고 보면, 동방의 배달국(BC 3,897-2,333)과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에서 전파된 것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재위BC 2,357-2,258),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시대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요서 지방 홍산(紅山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유적지를 조사한 이래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그 후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예를들면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에게 문명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한반도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 현재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홍산(紅山문화를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말엽 및 고조선(古朝鮮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중국의 건국(建國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문화'이다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단군(檀君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실제는 호족(.호랑이)과 웅족(.)을 배달(倍達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