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역사.문화

부케를 던지는 까닭의 기원과 역사

마도러스 2006. 7. 26. 03:42

부케를 던지는 까닭의 기원과 역사



'부케(bouquet)'는 우리말 '묶음', '다발'이란 뜻의 프랑스어랍니다. 요즘은 '부케'라고 하면 당연히 결혼식 때 신부가 손에 드는 '꽃다발'을 뜻하는데,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연히 서양인들의 결혼풍습입니다.


유럽에선 신부가 '부케'를 손에 드는 풍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처음에는 '꽃으로 만든 부케'를 든 것이 아니라, '다산', '풍요'를 상징하는 곡식 다발을 손에 들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당시의 신부가 손에 든 '곡식다발'은 유럽의 주작물인 '밀'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신부가 잘익은 밀이삭을 한다발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곡식다발 부케'는 의미는 좋지만 별로 폼나지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유럽지역에서 전염병이 유행할 때 유럽인들은 전염병이 악마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악마나 병마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주술적 의미 즉 우리나라의 부적처럼 악마를 쫓는다고 생각하는 약초와 같은 허브 식물을 조그맣게 다발을 만들어서 평소에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데...결혼식을 하는 신부들 역시 당연히 '약초다발 부케'를 손에 들었을 겁니다.

점차 세월이 흘러 전염병이 없어지고 일반인들은 약초다발을 지니고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결혼식에서 신부는 손에 부케를 들어야 할테니까... 전염병이 없어졌다고 해서 옛날처럼 다시 곡식다발을 드는 것은 아무래도 폼이 나지 않으니까
어느날 똑똑한 신랑이 들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한다발 꺾어서 약초다발 대신에 신부에게 쥐어 줬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약초다발'과 비슷하지만 꽃이 있어서 훨씬 보기 좋았을 겁니다. 그 때 그 결혼식에 참가했던 총각들이 그걸 보고는 '아항 나도 이담에 장가갈 때 저렇게 해야 겠구나...' 그래서 그 동네에선 그다음부턴 결혼식 때마다 신부가 꽃다발을 들게 되었을 겁니다. 그게 오늘날의 '웨딩부케'의 시작이었다고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부들이
결혼식이 끝나고 부케를 집어 던지는 것은 어디서 유래가 된 것일까? 다시 시대는 바뀌어 유럽의 옛날 즉 신부가 곡식다발 부케를 들었던 때로 돌아 가봅시다.

신부가 곡식다발을 손에 들고 신랑과 나란히 서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윽고 주례가 두 사람의 결혼을 선언하고 결혼식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객들은 신부의 머리위에다 밀알을 던졌습니다. 밀은 곧 그들의 양식이고, 밀농사가 잘 되어야만 풍요롭게 되니까 당연히 밀농사가 잘 되기를 빌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신부가 자식을 많이많이 낳아서 가능한 많은 가족(노동력)이 생기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였을 겁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현구고례'시 시아버지가 신부의 치마폭에다 대추, 밤을 던지는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여성=생산(출산)'으로 상징되어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의식에선 당연히 여성이 등장합니다.


여기저기서 던지는 밀알이 신부의 머리 위로 날아 보면 자연히 신부는 두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겠죠? 당연히 신부의 손에 들었던 밀이삭(부케)도 머리위에 던져진 밀알들과 떨어 졌을 겁니다. 그러자 동네 처녀들이 너도 나도 신부의 주변에 모여 들어 신부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밀알이나 밀이삭을 손에 받았습니다. 신부의 머리 위에 뿌려진 밀알은 곧 신부에 대한 축복이고 신부의 복을 받으면 자기도 곧 신부처럼 시집을 갈 것이다는 기대속에서 그 동네 처녀들이란 처녀들은 모두모두 그 밀알을 받으려 했을 겁니다.

한줌 밖에 안되는 밀알이 오래 갈 수는 없을 겁니다. 당연 동작이 느린 처녀들은 밀알 한톨 줏을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신부는 자기가 손에 들고 있던 밀이삭도 자기 머리위로 던져 친구들이 그걸 줍게 해 줬을 겁니다. 동네 처녀들은 신부가 머리 위로 던지는 밀이삭을 서로 받으려고 난리를 쳤을 겁니다.

그 모습은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서로 받으려는 신부의 친구들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겁니다. 로마인들은 오늘날 유럽의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건축물에서도 보듯이 건축기술도 아주 뛰어 났지만 과자 만드는 기술도 아주 뛰어 났었답니다.
기원전 100년경에 로마인들은 결혼식에 쓰이는 소품인 밀을 그대로 쓰지 않고 작고 달콤한 과자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밀알을 신부에게 던지는 즐거움을 잊지 못해서 종종 밀알 대신에 이 과자를 던졌던 것입니다.

던지고 남은 과자 부스러기는 다산을 빌면서 신랑 신부가 함께 먹었답니다. 그 후 하객들에게는 콘펫(달콤한 과자라는 뜻)이라고 하는 땅콩과 말린 과일, 꿀에 잰 아몬드로 만든 사탕과 과자를 나누어 주었답니다. 웨딩과자를 잘라 그것을 신랑 신부가 먹는 풍습은 서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이때 영국에서는 과자 부스러기를 먹을 때 특별한 맥주를 함께 마셨답니다. 이때 마시는 맥주를 '브라이드 에일(신부의 맥주라는 뜻)'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처럼 과자를 던지는 것, 즉 음식을 던지는 것은 그게 아무리 풍요의 상징이라고 해도 이런 풍습은 기본적으로 경건함을 중요시하는 중세시대의 풍습에 맞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세에 와서는 다시 신부에게 옛날처럼 밀알이나 이삭을 던졌답니다.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된다.'는 것은 유럽이나 우리나라나 같군요...

웨딩과자는 모습을 감추고, 간단한 비스킷이 결혼과자를 대신하게 되었는데,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가져온 과자가 남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답니다. 영국에서는 그 무렵 결혼식에 가져온 비스킷, 스콘 등의 구운 과자를
한 곳에 쌓아올려 산처럼 만들었는데 과자로 만든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두 사람은 복을 많이 받는다고 여겼으며 신랑 신부는 그렇게 쌓은 과자산 위에서 키스를 했답니다.


1660년 샤를 2세가 통치하던 프랑스의 한 요리사가 런던을 방문했는데, 그는 영국인들이 결혼식에서 과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답니다. 그런데 쌓아올리는 방법이 엉터리여서 과자는 쌓는 가장자리에서부터 부서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요리사는 차라리 부서지는 과자 대신에 처음부터 설탕옷을 입혀서 딱딱하게 만든 과자로 쌓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 층의 호화판 '웨딩 케익'을 만들어 보였든데, 당시의 영국 신문들은 프랑스인의 이 주제넘은 아이디어를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160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전 영국의 빵굽는 기술자들이 이 아이디어에 따라 케익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런 기술이 흘러흘러 동양의 한국이란 나라에까지 흘러 들어와서 무슨 때가 되기만 하면 케익을 자르는 풍습이 생겼는데... 그 케익이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시루떡'이라고 하는 한국 전통의 '케익'을 점차 밀어내고 톡톡히 '시루떡'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오늘날 결혼식에서 쓰이는 '부케'와 '케익'은 원래는 함께 생겨나서 던져지기도 했었지만 점차 그 역할을 달리 하여 '부케'는 던지는 것, '케익'은 먹는 것으로 분리가 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볼 때 '부케'는 결혼식이 끝나고 신부가 머리 위로 던져야만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케를 신부가 몰래 자기 맘에 드는 친구에게 전해 준다면 이미 그 '부케'는 '웨딩부케'로서의 자격은 상실이 되어 단순한 '꽃다발'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부케는 던지기 바랍니다.

글: 紫微垣 이미지. 일피오레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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