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 짐(baggage)은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마도러스 2021. 11. 29. 23:48

 

■ 짐(baggage)은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 채찍질하는 마부(馬夫), 등짐 분담하는 농부(農夫)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미쳐서 죽었다. 그의 말년 모습은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겨울철, 그는 이탈리아 토리노(Torino)로 휴가를 떠났다. 니체(Nietzsche)는 거기서 몇일 휴가를 즐겼다. 1889 01 03, 그는 편지를 부치러 하숙집을 나서며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토리노(Torino)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들어섰을 때, 맞은편 마차 대기소에서 난폭한 마부가 자신의 늙은 말(Horse)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무거운 짐마차를 끌고 가던 말은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말았고, 겁먹은 말은 마부가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부는 화가 나서 더욱 세차게 채찍질을 했다.

 

그 순간, 니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억눌렀던 동정심(同情心)이 터져 나와서, 그의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니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말의 목을 감싸 안았다. 흐느키며 울었다. 정신을 잃은 니체는 말의 목을 껴안은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니체의 하숙집 주인도 광장으로 내려왔다가 니체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니체는 이전의 니체가 아니었다. 그는 침대에서 2일간 꼬박 누워 있다가 몇 마디 말을 웅얼거렸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1년 동안 정신 나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니체의 정신을 무너뜨린 최후의 사건인 채찍질 당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마차에 묶여 있는 말처럼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매여 넘어설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보았던 것일까? 그의 광기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니체는 정신을 놓기 전 마지막 순간에 말의 목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생명 자체에 대한 위대한 각성이다.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이 생명답게 존중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세상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도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니체가 늙은 말을 부둥켜안은 것은 존재에 대한 연민(憐愍)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마차를 끌고 가는 말과 삶의 등짐을 지고 가는 자신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했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지도 못한 채 채찍을 맞아야 하는 삶이라면 얼마나 고달픈가? 그것이 가죽의 채찍이든, 세파의 채찍이든 말이다. 니체가 눈물샘이 터져 울부짖은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장편 소설 대지’(大地) 193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Buck) 여사는 니체(Nietzsche)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1960년에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늦가을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경북 경주(慶州)를 향해 달렸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노랗게 물든 들판에선 농부들이 추수하느라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차가 경주(慶州)시 안강(安康) 지역을 지날 무렵, 볏가리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보였다. 그 옆에는 지게에 볏짐을 짊어진 농부가 소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신기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펄벅(Pearl Buck)은 길을 안내하는 통역을 통해 농부에게 물었다.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지 않고 힘들게 갑니까?”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다.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도 일을 했지만, 도 하루 힘들게 일했으니, 짐을 나누어서 지고 가야지요.” 그녀는 농부의 말에 감탄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하게 볼 광경이었다. 왜냐면, 힘들게 지게에 짐을 따로 지고 갈 것이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싣고, 농부도 타고 가면, 아주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펄벅(Pearl Buck)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옮겼다. “이제 한국의 나머지 다른 것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볏가리 짐을 지고 가는 저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자, 오늘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내 조국, 내 고향, 미국의 농부라면, 저렇게 힘들게 짐을 나누어지지 않고, 온 가족이 달구지 위에 올라타고, 채찍질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농부는 짐승과도 짐을 나누어 짐지고, 한 식구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저 장면 하나로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을 모두 다 보았다. 농부가 소의 짐을 거들어주는 모습만으로도 한국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꼈다.” 당시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녀는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간 뒤, 이 모습을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고백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체는 자기 삶의 무게를 지고 간다. 험난한 일생(一生)을 견뎌내는 그 일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하물며 같은 종의 인간끼리라면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귀하게 여겼던 농부처럼 우리는 본디 작은 배려를 잘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나만 아니면 된다 라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로 꽉 차 있지는 않은가?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함께 걷는 것은 아름답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존귀하게 여겼던 농부의 배려심은 무척 아름답다. 배려심이 부족한 지금의 우리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 하지만, 요즘 SNS 댓글에는 오늘도 비수(匕首) 같은 말들이 홍수를 이룬다. 당신은 늙은 말에 채찍질하는 마부(馬夫)인가, 등짐을 나눠지는 농부(農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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