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글 예찬

한글은 세종대왕이 혼자 창제했을까?

마도러스 2016. 7. 29. 02:11


■ 한글은 세종대왕이 혼자 창제했을까?

 

★ 과연세종대왕 혼자 한글을 완벽하게 만들었을까?

 

세계 문자 올림픽이 1차 2009, 2차 2012년에 열렸다두번의 문자 올림픽 모두 한글이 1위를 차지했다글자는 수백년에 걸쳐 다듬어 지는 과정을 거쳐 완성이 되는 것이다그런데한글은 세종대왕 한사람의 노력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그동안그 대목이 미스테리(mystery)였다과연그럴까그러한 의문점을 해소해 주는 것이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가림토(加臨土글자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옛것을 참조 하였다.'고 하였다가림토(加臨土글자는 38자로 이루어져 있는데이중 10 글자를 뺀 28자가 훈민정음과 일치하고여기에 글자를 뺀 24자가 현재 사용 하는 한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 한민족(韓民族)이 세계 최초의 문자를 발명했었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의 녹도문자(鹿圖文字)는 신지(神誌혁덕(赫德)이 세계 최초로 창제했으며동아시아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배달국(倍達國)의 녹도문자를 개량한 것이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초기의 신전(神篆)이라는 문자이다신전(神篆)은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되는 고조선의 토기에서 많이 발견된다그 후고조선의 가림토(加臨土문자가 개발되었는데, 3세 가륵 단군 때(BC 2181삼랑(三郞을보륵(乙普勒)이 창제했다자음과 모음을 합하여 38()이고지금도 만주에 가면가림토(加臨土문자로 새겨진 비석이 많이 있다그 후(殷 BC 1,600-1,046)의 갑골문자가 개발되었다한자(漢字)는 은(殷 BC 1,600-1,046)의 갑골문자가 주()나라의 대전(大篆), ()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한조(漢朝때에 한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훈민정음(訓民正音)은 고조선의 가림토(加臨土문자가 세종대왕에 의해 재현되고 발전된 것이며오늘날의 한글로 발전되었다.

 

한글과 한자(漢字)는 한국 최고의 문화 유산이다한자(漢字)의 시조로 불리는 창힐(B.C.28세기-B.C.27세기)은 동이족(東夷族조선족사람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14대 치우천황(B.C 2,707년 즉위)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한민족은 가장 과학적인 한글도 만들었고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한자(漢字)도 만들었다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이 유산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창힐()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녹도문자(鹿圖文字)를 배웠고녹도문자(鹿圖文字)를 계승 발전시켜 창힐 문자를 창안했다그리고 창힐은 창힐 문자를 중국에 널리 보급시켰다이로써 중국에 최초 문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창힐()은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치우천황(B.C 2,707년 즉위)의 제후로서 배달국의 녹도문자(鹿圖文字)를 중국에 전한 사람이다창힐 문자는 다시 은(殷 B.C 1,600-1,046)나라 시대에 이르러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했다()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으로 망명하면서 갑골문자를 고조선으로 들여왔다그래서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말엽에 녹도문자가림토 문자갑골문자를 함께 사용되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반면 녹도문자(鹿圖文字)와 가림토(加臨土문자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그리고갑골문자(甲骨文字)는 다시 한자(漢字)로 발전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중국(中國)은 고구려발해를 포함한 중국 동북 지역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했고, 2,002년부터 동북(東北공정 프로젝트를 강행했다그리고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만주에서 ‘요하(遼河문명’ 유적을 발굴하였다그러자마자 만주(滿洲일대에서 '황하 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중국 당국은 깜짝 놀랐고전세계 역사학계는 발칵 뒤집혀졌다.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고 한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산동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산동 반도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이것을 배달(倍達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기존의 역사학자들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건국이념이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건국이념이라고 강변했지만그것은 일제(日帝시대에 일본에 의해 조작된 식민 사관의 결과이며사실은 고조선(古朝鮮)의 건국 이념이 아니라 고조선 이전의 배달(倍達 BC 3,897-2,333)의 건국이념이다.

 

 중국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에서 발굴되고 있는 홍산(紅山문화를 ‘요하(遼河문명이라고 부르고 있고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다하지만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의 한민족이 일구어 놓은 홍산(紅山문화의 일부분에 불과하다중국의 황하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倍達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의 홍산(紅山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1980년대에 홍산(紅山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 역사학계가 깜짝 놀랐다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기 때문이다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고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이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의 홍산(紅山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 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다예를들면홍산(紅山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 BC 3,897-2,333) 홍산(紅山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환국(桓國)의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었고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요( BC 2,357-2,258), ( 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우임금(나라의 시조). 탕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중국의 건국(建國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임금()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청구 배달(靑丘,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문화'이다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의 '단군(檀君신화중에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실제는 호족(.호랑이)과 웅족(.)을 배달(倍達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은 신시(神市배달(1-13대 환웅)과 청구(靑丘배달(14-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 경기장과 거리에 온통 붉은 물결로 장식되는 도깨비 형상의 “붉은 악마가 고대사(古代史)에 등장하는 청구 배달(靑丘산동성, 14-18대 환웅)의 치우(蚩尤천황(天皇)이다치우 천황은 중국 민족의 시조(始祖)인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제압하고고대(古代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한 인물이다.

 

2002년 월드컵 때한국 축구 응원팀이 1999년부터 선보인 붉은 악마의 이미지는 중국인들이 동이족(東夷族)인 치우(蚩尤)천황을 비하(卑下)하여 도깨비의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치우(蚩尤천황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용장(勇壯)이었으며신의(信義)와 인의(仁義)로써 백성을 다스렸고신력(神力)과 정의(正義)를 만고(萬古)에 떨쳤던 자랑스런 배달국(倍達國)의 왕이었다오랜 역사 속에 묻혀있던 치우(蚩尤천황이 드디어 2002년에 한국 축구의 수호신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 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하지만배달국(倍達國, BC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이후우리나라는 점점 중국의 속방(屬邦)으로 전락해 버렸다결국()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高麗충렬왕 때황제(皇帝)의 지위에서 왕()의 지위로 호칭이 격하되었다천자국(天子國)의 천자(天子)로서 천제(天祭)를 올리는 의식도 중국의 억압에 의해 올리지 못 하였다.


 일제(日帝) 1925년 사이토 총독의 칙령에 따라 전국의 50여종 20만권의 사서(史書)를 압수하거나 불태웠고, 중요 사료는 일본이 가져가 황실 도서관 및 동경 대학 지하 비밀 서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는 고조선(古朝鮮) 단군(檀君)의 곰. 호랑이 신화(神話) 이야기를 충실히 대변해 주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2권만 남겨놓았고, 고조선(古朝鮮). 배달(倍達, BC3,897-2,333) 이전의 역사책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제(日帝) 1925년 설치된 조선사(朝鮮史) 편수회(編修會)’에 의해 왜곡 조작된 역사를 조선인들에게 가르쳤다. 1945년 해방 후, 친일파(親日派)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고, 1948년 일제(日帝) 식민지 사관(史觀)이 그대로 반영된 '한국사(韓國史) 대관(大觀)'을 편찬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 교과서의 근간이 되어 교육되어졌다. [글 작성: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