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역사.문화

양귀비와 조비연이 임신을 하지 못한 이유

마도러스 2009. 1. 9. 14:43


양귀비와 조비연이 임신을 하지 못한 이유  


중국 한나라 12대 왕인 성제(成帝)의 두 번째 황후로서 10년이 넘게 황제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 '조비연'이다. 그리고, 당나라 6대 왕인 현종(玄宗)의 사랑을 독차지한 인물이 '양귀비'이다.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인 조비연과 풍만한 미인의 상징인 양귀비는 각각 서로 다른 한 시대를 풍미한 희대의 미인이다

 

조비연과 양귀비는 너무나 다른 외모와 그 시대의 미적 기준으로 공통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데그러나 이들에게도 황제의 여인이었다는 점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바로 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음에도 두 사람 모두 한 번도 임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비연은 중국 5대 미인으로서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가녀리고 날씬한 몸매 덕에 날으는 제비라는 뜻의 비연(飛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조비연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날씬한 몸매와 출중한 가무로 성제의 비빈들 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아름다움을 자랑해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한 번은 성제가 조비연을 위해 연못 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춤을 추던 조비연이 너무 가냘퍼 강풍으로 연못에 빠질 뻔 했다는 기록까지 전할 정도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제는 조비연이 바람에 날아가버릴까 걱정돼 호화로운 칠보피풍대를 지어 살게 했다고 한다조비연은 가녀린 몸매로 황제의 총애를 얻지만또한 그로 인해 황후의 신분으로 가장 중요했던 임신을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지나치게 마른 여성즉 의학적으로 체지방이 비정상적으로 부족한 여성은 내분비계 혼란을 쉽게 야기할 수 있어 임신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내분비계 혼란은 난소에서 에스트로겐이 정상적으로 분비되는 것을 막아 월경주기가 불규칙적으로 변하고 심지어 폐경을 야기하는 경우도 있다실제로 전체 불임 여성의 약 6%는 비정상적으로 낮은 체중이 원인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조비연은 희고 가냘픈 피부를 만들기 위해 향기환이라는 환약을 사용하였는데 이 또한 임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사향고려인삼녹용 등으로 만든 이 약은 피부 미용에는 효과가 탁월했으나 장기 복용하면 약의 독 성분이 체내에 잔류하며 불임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 4대 미인으로서 양귀비가 임신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이 역시 황제의 총애를 얻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동시에 임신을 방해했던 양귀비의 몸에 그 비밀이 있다.

 

당 현종을 사로잡은 양귀비의 미모는 시인 백거이가 자신의 시에서 연꽃 같은 얼굴새하얗고 가녀린 피부아름다운 자태와 걷는 모습심지어 우는 모습까지도 아름답다고 칭송한 바 있다그렇지만 꽃다운 궁녀와 비빈들이 넘치는 궁중에서 과연 그것만으로 오랜 세월 동안 당 현종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양귀비에 대한 당 현종의 사랑에는 양귀비의 풍만한 몸매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기록에도 양귀비는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많이 흘렸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양귀비가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상당한 비만 체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이 양귀비가 임신을 하지 못했던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비만 여성은 고혈압동맥 경화당뇨 등의 성인병 발병 위험이 높을 뿐 아니라 월경 불순이나 불임이 유발될 수도 있다.

 

특히 체질량 지수 27 이상인 여성은 생리 불순과 배란 장애로 인한 불임이 흔히 동반될 수 있다자궁 내막암의 발병률 역시 정상체중보다 3~5배 가량 높다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살찐 사람은 중풍에 걸리기 쉽고 불임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결론은 역시 지나치게 마르거나 뚱뚱한 몸매 보다는 건강한 체형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이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堯.재위BC 2,357-2,258), (舜.재위BC 2,255-2,208),(夏,BC 2,205-1,766), (殷,BC 1,600-1,046), (周,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이 처음 발굴을 시작하였고,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백두산,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산동성.태산(泰山),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환국(桓國)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배달(倍達 BCE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E 3,500-2,600년). 황하 문명(BCE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E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E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다.' 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9,200년이나 된다.

 

환국(桓國)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장자국(長子國)이고조선(古朝鮮)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우리 배달(倍達)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전욱고양제곡고신. 요(堯)임금(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 배달(靑丘,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 문화 (紅山文化)'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