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긴 역사찾자

■ 배달국(倍達國)의 출현과 웅족(熊族) 및 호족(虎族)

마도러스 2006. 6. 17. 14:35

■ 배달국(倍達國)의 출현과 웅족(熊族) 및 호족(虎族)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환인(桓仁)이 다스리는 환국(桓國, BC 7,199-3,897)의 말엽에 자식들의 수장(首長) 이름은 환웅(桓雄)이었다. 환웅(桓雄)은 널리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천산 산맥의 동남쪽에 있는 삼위산(三危山, 중국 서부 돈황현敦煌顯 일대)과 백두산(白頭山)을 두루두루 살펴본 후, 동방 땅의 백두산(白頭山)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환인(桓仁)에게 알렸다. 환인(桓仁)은 아들 중의 장자(長子)인 환웅(桓雄)의 뜻을 끝내 허락하여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8-2,333)을 건설하게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시베리아와 연결된 발달된 문화를 지닌 환족(桓族)의 환웅(桓雄)이 보수적 문화 성격에 머무르고 있던 만주 지역의 토착 세력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동화(同化)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모계 사회였는데, 환웅(桓雄)이 거느린 환웅(桓雄)족이 남하(南下)하면서, 모계(母系)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환웅(桓雄)은 환국(桓國)의 환인(桓仁)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가지를 받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의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개창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이라 하였다.

 

"삼성기" 상권을 보면, “환웅(桓雄)은 팔괘(八卦)를 그어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을 잡아 신()을 움직였다. 그는 ()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고, 혼인(婚姻)의 예법을 정하여 짐승가죽으로써 폐물을 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市場)을 열어 물물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경농과 목축은 신석기 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경제 형태로서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환웅(桓雄) 혼인의 예법을 정했다' 라는 말은 가족 단위 사회에로의 전환을 뜻하는 신석기 시대적인 표현인 것이다. 시장(市場)을 열고, 교역이 이루어진 것도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실제의 내용을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록인 것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 편을 보면, “풍백 석제라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 동굴 속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 와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일으켰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가 반지하식 움집이고, 동굴 유적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연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일치하는 내용들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에서는 환웅(桓雄)이 처음 내려왔을 때, 그 지역에 두 족속(族屬)이 있었다고 한다. 웅족(雄族)과 호족(虎族)인데, 새로 살기 시작한 어리석고 자부심 높은 웅족(熊族)과 옛부터 있었던 난폭하고 탐욕스러우며 약탈을 일삼는 호족(虎族)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종족들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았고, 통혼(通婚)조차 없었다고 한다. 환웅(桓雄)이 두 종족을 교화시켜 같이 살게 하였는데, 웅족(雄族)은 교화되어 동화되고, 호족(虎族)은 끝내 깨우치지 못하여 이들을 사해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환웅(桓雄)에게 쉽게 동화되어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데 성공한 웅족(熊族)과 동화되지 못하고 차츰 사라지는 호족(虎族)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래서, 한반도에는 호랑이 토템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웅족(熊族)과 결합하면서, 호족(虎族)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 말기부터 작은 돌을 깎아 수렵에 활용했던 세석기(細石器) 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후, 중국 북부 지역과 대진국(발해) 연안, 요동 반도, 남만주 일대에서 농경과 목축을 하는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BC 6,000년경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이들 신석기 문화는 주변지역의 중심 문화권으로 계속 발전해 가고 있었다. 두 문화는 지역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대진국(발해) 북안, 만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수렵 생활 위주의 호족(虎族)과 농경생활 위주의 웅족(熊族)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리고, 호족(虎族)과 웅족(熊族) 모두 모계(母系) 사회였는데, 환웅(桓雄)이 거느린 환웅(桓雄)족이 남하(南下)하면서, 모계(母系) 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BC 8,000-4,000년까지 모계(母系) 씨족 사회의 신석기인들이 황해 내륙과 만주 및 대진국(발해) 연안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었다. 이들은 반지하식 수혈(竪穴) 움막에 살았으며, 죽어서는 수혈식 토갱(土坑)에 묻혔다. 그들은 모계(母系)의 근원인 할머니를 수장(首將)으로 삼았었다. 흥륭와(興隆窪) 유적지에서 나오는 돌조각 여인상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여자들은 농사도 짓고, 곡식을 저장하고, 또 익혀 먹기 위해 질그릇을 만들었는데, 주로 지자문(之字文) 문양의 빗살 무늬를 새겨 넣었고 이것이 지자문(之字文) “빗살 무늬 토기인 것이다.

 

지자문(之字文) “빗살 무늬 토기 BC 6,000년전에 시작되었고, 한반도와 산동 반도 대문구(BC 5,000-3,000), 압록강 접안, 요동 대련 반도의 소주산, 심양의 신락(BC 5,500), 길림시 서단산, 장춘시 좌가산, 그리고 서요하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紅山, BC 5,500)까지 고루 발견된다. 부신시(阜新市) 사해 문화 유적지는 대릉하(大凌河)의 가지인 청하(淸河) 부근에 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되는 옥도끼는 매우 특이한 의미를 지닌다. 옥도끼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옥병(玉兵)으로 등장하였고,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에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BC 6,000년의 부신시(阜新市) 사해(査海) 문화에서 옥병(玉兵)의 출현은 중원(中原, 중국 황하) BC 3,000년 보다 빠른 것이다.

 

​★ 배달국(倍達) BC 3,898-2,333년의 기간 동안, 18대의 환웅 계보를 갖고 있으며, 신시 배달(神市,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첫째, 배달국(倍達國) 신시(神市) (1-13대 환웅) 시대의 환웅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1대 배달 환웅(居發桓, BC 3,898-3,804년 재위,일명 거발한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BC 3,804년 즉위),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BC 3,718년 즉위),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BC 3,619년 즉위),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 3,512년 즉위),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BC 3,419년 즉위), 7대 거련 환웅(居連, BC 3,321년 즉위),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BC 3,240년 즉위), 9대 양운 환웅(養雲, BC 3,167년 즉위), 10대 갈고 환웅(葛古, BC 3,071년 즉위),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BC 2,971년 즉위),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BC 2,879년 즉위),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BC 2,774년 즉위).

 

둘째,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14-18대 환웅)시대의 환웅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14대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 일명 자오지慈烏支 환웅), 15대 치애트 환웅(蚩額特, BC 2,599년 즉위),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BC 2,544년 즉위),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BC 2,453년 즉위),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BC 2,380-2,333년 재위).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 재위BC 2,357-2,258), (. 재위BC 2,255-2,208), (, BC 2,205-1,766), (, BC 1,600-1,046), (,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이나 된다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 배달국(倍達國)이었고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배달국(倍達,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 요하(遼河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동이족(東夷族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 '홍산(紅山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환국(桓國) 12개 나라 가운데수밀이국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요하(遼河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 황하 문명(BC 3,000-2,500).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임금(나라의 시조). () 임금(나라의 시조). 문왕(나라의 시조). 무왕(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삼황(三皇)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오제(五帝) 소호 금천전욱 고양제곡 고신. () 임금() 임금을 말한다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청구 배달(靑丘, 14-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단군(檀君) 신화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호랑이) 웅족(.)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