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歌謠)

■ 돌아오세요 (남진)

마도러스 2023. 5. 10. 08:52

 

■ 돌아오세요 (남진)

돌아오세요.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어요.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한 걸, 따지면 무엇하나요.

뜨거운 가슴이 하나로 마주칠 때, 미움은 사라지고

인생사 그런 것, 우리들도 지난 날 잊어버리고

다시 또 한 번, 다시 또 한 번, 시작하는 거예요.

.... 간 주 ....

없었던 일로 없었던 일로 생각하고 있겠어요.

미워해 본들, 원망해 본들, 아무런 소용없어요.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마주칠 때, 사랑은 하나인데

세상사 그런 것, 우리들도 지난 날 잊어버리고

다시 또 한 번, 다시 또 한 번, 시작하는 거예요.

.... 간 주 ....

없었던 일로 없었던 일로 생각하고 있겠어요.

미워해 본들, 원망해 본들, 아무런 소용없어요.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마주칠 때, 사랑은 하나인데

세상사 그런 것, 우리들도 지난 날 잊어버리고

다시 또 한 번, 다시 또 한 번, 시작하는 거예요.

■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南珍) : 1946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이며, 2남 7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남진이다. 대표곡으로 가슴 아프게(1967). 그대여 변치 마오(1973). 마음이 고와야지(1974). 님과 함께(1975). 꽃분이(1977). 미워도 다시 한번(1977). 빈잔(1982). 돌아오세요(1987). 둥지(1999). 모르리(2002). 빈 지게(2005). 당신이 좋아(2009). 너말이야(2011). 뜨거운 것이 좋아(2012). 상사화(2014) 등이 있으며, 그동안 발표한 곡이 1000여 곡에 이른다. 한양대 연극 영화과에 진학해 1965년 `서울 플레이 보이`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가슴 아프게(1967)`로 인기 몰이 중이던 1967년 해병대에 입대해 1969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 이전에는 춤추는 가수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서울 플레이 보이` 노래로 데뷔했고, ‘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다리 좀 떨었더니,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혹은 플레이 보이(play boy)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그는 말한다.

가수가 되기 위해 가출(家出)해서 집을 나와 버린 남진은 처음에 대중들의 눈을 끌진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가슴 아프게(1967)를 불러 단번에 뜨는 가수가 됐다. 그런데,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가슴 아프게’가 아니었다. 그가 작곡가 박춘석에게서 처음 받은 노래 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이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그 시절 대중들 취향에 맞는 노랫말이 좋다고 느꼈으나 노래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노래 제목 대부분이 명사(名詞)로 끝나는 게 전통이었으나 과감하게 부사(副詞)나 형용사(形容詞)로 만들어 보기로 하고, 제목을 바꾸어서 최종적으로 정해진 것이 가슴 아프게(1967)였다. 부사(副詞)로 끝나는 제목이 드물었던 터라 노래는 나오자마자 크게 히트했고, 1967년 ‘가슴 아프게’란 제목의 영화까지 나왔다. 남진은 그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아 가수 겸 영화 배우로 날개를 달았다. 한국 최초가수 팬 클럽이 만들어진 가수로 기록될 만큼 인기 정상을 달렸던 그는 1967년 해병대에 입대했고, 한국의 베트남 전쟁(1959-1975) 참전 바람을 타고 1969년 증파되는 베트남 참전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었고, 1971년 귀국 때까지 전장에서 뛰었다. 1970-1980년대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으며, 그는 파란 많은 45년 음악 인생 중에 파도를 세 번 만났다. 해병대 군복무로 인한 3년간 공백기, 결혼 후 썰물처럼 팬들이 빠져나가 외국에서 떠돌던 시절, 5공 때의 정부의 외압으로 낙향해 칩거했던 3년이다.

목포 일보 발행인이었던 아버지(김문옥 씨)와 도정업을 하던 어머니 사이 유복한 집안의 2남7녀 중 장남, 그것도 늦둥이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5대 국회의원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 조병옥ㆍ신익희ㆍ장면 선생 등이 전라도에 가면 으레 그의 집에서 묵었을 정도이다. 부친은 그에게 "왜 풍악 쟁이를 하려 하느냐"며 설득했다. "당시 최고 인기배우가 김승호 씨였는데, 그러시더군요. `세상에 김승호가 몇이냐. 김승호는 단 한 명이야. 그런데 네가 김승호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셨죠." 그런데 예상치 않은 곳에서 행운이 찾아왔다. 전날 과음한 탓에 노래를 못하게 된 김영광을 대신해 부른 트로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대박이 났다. "우연히 택시를 탔는데 기사 양반이 제 노래를 따라 부르데요.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그 후로는 탄탄대로였다. 발표하는 곡마다 폭발적 반응이었다. 덕분에 국내 가수 중에서 처음으로 당시 최고급 승용차였던 `코로나`를 몰았다. 불과 스물두 살 때 일이다. 투병 중이셨던 부친은 그가 히트곡을 내기 6개월 전에 눈을 감으셨다. "아들이 풍악 쟁이 하면 집안 들어먹을 테니 잘 지키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당부하고 떠나셨다. "생애 처음으로 자가용을 샀을 때 어머니는 `네 아버지가 이렇게 네가 성공할 줄 알았겠느냐`며 제 성공을 보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생각에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는 한동안 그 차에 아버지 사진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철없는 아들을 걱정하며 떠나신 아버지에게 사진으로라도 성공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원래 그의 꿈은 가수가 아니었다. 가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꿈은 배우였다. 한양대학교 연극 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그 이유였다. 배우를 꿈꾸던 그가 갑작스레 가수의 길로 접어든 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서울로 놀러온 친구들과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흥에 겨워 무대에서 노래를 한 곡 뽑은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팝송 `거짓된 그대 마음(Your cheating heart)`을 멋지게 부른 그를 밴드 마스터가 눈여겨 보고 전화번호를 받아갔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남진은 그 밴드 마스터 소개로 당대 최고 작곡가 한동훈과 인기 가수 남일해를 만나 노래 공부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아 노래 연습실에 나가기 시작한다. 요즘 말로 하면 연습생이 된 것이다. "대학 1학년 한창 나이 때니 이성에 관심이 더 많았죠. 노래보다는 학원에 온 예쁜 여학생들 보려고 등록했죠. 하하." 1965년 드디어 한동훈 작가의 곡 `서울 플레이 보이`로 데뷔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녹음만 하면 가수가 되는 줄 알았죠. 소속사도 없는 신인 가수를 밀어주는 곳은 없었어요. 음반 업계 생리를 몰랐던 순수한 시절이었는데 상처도 많이 받았죠." 그러던 중 작곡가의 소개로 그는 계약금 5000원에 오아시스 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된다. 하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그는 무명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입이 트도록 연습해 노래로 잠꼬대를 할 정도였다.

남진은 결혼 후 고향인 목포로 내려와 계약 문제로 인해 부득이하게 홀로 유흥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유흥업에 초보였던 남진은 기존 폭력배들의 텃세 등으로 인해 힘들었다. 1979년 폭력배에게 허벅지를 칼로 찔려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적이 있다. 그때 사고로 왼쪽 다리가 불편해졌다. 걸어 다니면 불편한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어 주변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공연장에 괴한이 나타나 나훈아의 볼에 큰 상처를 내자, 사람들이 나훈아와 라이벌인 내가 괴한에게 사주 한 것처럼 괴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억울했다. 나중에 그 가해자가 감옥살이를 한 후, 남진 본가에도 불을 질렀다. 라이벌 관계이니 그런 루머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결혼과 4명 자녀 출산으로 인해 3년 공백기 후에 컴백하니 세상도 가요계도 많이 바뀌었다. 그 때 컴백곡이 ‘빈잔’이었는데, 히트하기까지 10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출연 교섭이 왔다가도 막상 촬영일이 되면 취소 통보를 받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느낌으로만 아는데 느낌을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남진과 나훈아는 지금도 회자되는 가요 역사상 최대 라이벌 관계였다. 남진과 나훈아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만큼 팬들 역시 라이벌 관계였다. 둘 중 한명이 상을 받게 되면 못 받은 쪽의 팬들이 마치 초상 난 것처럼 대성통곡을 할 정도였다. 팬들이 상대의 무대에는 박수도 안 쳤다. 당시 연예인들도 말을 조심히 할 정도였다. 해병대에 입대했던 남진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6개월간 근무했다. 당시 그에게 죽을 고비가 3번이나 있었다. 내무반에 있던 그는 갑자기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포에 급히 몸을 엎드렸다. 하지만 포가 그의 가까운 곁에 꼽혔다. 다행히도 포탄이 모래 바닥에 꽂히면서 불발탄이 되면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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