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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解脫) 시(詩) (서산 대사)

마도러스 2014. 1. 23. 12:07


해탈(解脫) 시(詩) (서산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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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걱정 없는 사람 그 누구인가?

출세(出世)하기 싫은 사람 그 누구인가?

시기 질투(嫉妬) 없는 사람 그 누구인가?

작은 잘못 흉허물 없는 사람 그 누구인가?


가난(家難)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障碍)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마오.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라오.


가진 것 많다 유세(遊說)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 소리 치지 말고

명예(名譽)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世上).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 하지 말고

얼기 설기 어우러져 함께 살다 가세.


모든 것은 한줄기 바람 같은 것이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과 이별(離別)의 슬픔이 다 한 순간이라오.

사랑(熱愛)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산들 바람 같은 것이고

외로움이 깊다고 해도 한순간 눈보라에 불과한 것이라오.


폭풍이 아무리 세고 험해도 지난 뒤엔 고요한 것이라오

아무리 장대하고 화려한 사연(事緣)도 지나고 난 뒤에는

어느덧 쓸쓸하고 허전한 바람이 맴돈다오.

사람 사는 것이 모두 나그네 인생(人生)이라오.


버릴 것은 버려야지. 잊을 것은 잊어야지.

내 것이 아닌 욕심(慾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요.

줄 것이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요.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이라오.


이 세상(世上)의 그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하지마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우리가 묶어 둔다고 그냥 있겠오.

흐르는 세월(歲月) 붙잡는다고 그것이 아니 가겠오.


그저 부질없는 욕심(慾心)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 피고

인생 계급장(階級章) 이마에 붙인들 무엇하리오.

뭐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나요.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 하늘도 있지 않오.

살다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지 않겠오.

잠시 대역 연기(演技) 한 토막 하는 것일 뿐이라오.


슬픈 표정 짓는다 하여

뭐 그리 달라지는 것이 있겠오.

궂은 표정 짓는다 하여

어찌 세상(世上) 일들이 변하겠오.

내 인생(人生), 네 인생 뭐 별것 있겠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지나다 보면

멈추기도 하고, 좋은 곳에 머물기도 하지요.

다들 인생(人生)을 그렇게 산다고 하지요.


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니

구름은 본시 실체(實體)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다고 하지요.



■ 서산(西山) 대사 : 평안도 안주(安州) 출생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승병을 이끌고 서울 한양(漢陽)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는 국운을 미리 염려하여 민족 사상을 정립하려고 노력한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불교인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집필하여 승려의 선지를 제시했고, 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신앙인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확고한 민족 철학을 제시했던 것이다. 도교(道敎)인들의 올바른 수행을 가르치기 위해 도가귀감(道家龜鑑)을 저술하여 제시했으며, 유교(儒敎)인들의 생활 철학을 간소화하고 실천해갈 수 있도록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하여 유포시켰다. 당시 유생들이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포함으로써 유행시켰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명심보감(明心寶鑑)이 유학의 기초 서적의 위치를 지키게 되었다. 또한, 서산(西山)에 숨겨져 있다는 천부경(天符經) 81자를 발견하여 조상의 얼을 되살리려고 정성을 쏟았다.


그는 유(儒). 불(佛). 선(仙)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하여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1534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하야 숭인(崇仁)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전등록(傳燈錄).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 스님에게서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받았다. 1552년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교종판사(敎宗判事) 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서울 한양(漢陽)의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 사건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하여 서울 한양(漢陽)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금강산(金剛山)에 상주하다가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낸 후, 나이 85세에 입적했다. 그는 본래 완산(完山) 최(崔)씨이며 본명은 여신(汝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