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일반)

붙이면 고름이 쏙! 고약 ‘국민의 약’ 100년

마도러스 2008. 11. 17. 03:58

 

붙이면 고름이 쏙! 고약 ‘국민의 약’ 100년  


‘부스럼 많던 그 시절의 만병통치약’ 이명래 고약 1906~2006

이명래 선생 ‘사위의 사위’가 家業 이어, 아직도 찾는이 많아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은 광고 문구.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부스럼 치료에는 고약만 한 것이 없었다. 기름종이에 싸여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단단한 고약을 성냥불에 살살 녹여 붙이면 고름은 쏙 빠지고 상처는 아물었다. 부스럼이 흔하던 시절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던 명약(名藥) ‘이명래 고약’ 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부근에서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보던 시절의 故이명래씨. 사진은 1939년이나 1940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 임재형 원장 제공

최신 항생제가 너무 흔해 탈인 세상이지만 관절염으로 무릎이 퉁퉁 붓고 아픈 사람, 출산 후 유선염으로 고생하는 여성, 욕창으로 살이 문드러지는 만성 환자, 수술을 받아도 좀처럼 낫지 않는 염증을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이명래 고약을 찾는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건물 뒤편 골목길. ‘명래 한의원·이명래 고약집’이란 간판 아래 한의사 임재형(62) 원장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그는 고인이 된 이명래(李明來)씨의 둘째 사위의 사위다.


임 원장은 “열 나고, 붓고, 아픈 것은 다 염증인데 염증에는 고약이 제격”이라고 말했다. 미8군에서 근무하던 의사도 어린 딸이 이하선염(귀밑에 있는 침샘에 생긴 염증)에 걸리자 마땅한 항생제가 없다며 이명래 고약을 찾았다고 한다. 이명래 고약은 1906년 처음 나왔다. 이씨는 충남 아산에 있는 공세리 성당에서 만난 프랑스인 선교사 드비즈 신부에게서 고약 만드는 법을 배웠다.


“드비즈 신부가 라틴어로 된 약용 식물학 책을 가져왔더래. 게다가 신부는 중국을 거쳐 오면서 한의학도 배운 게야. 신부의 가르침에다 이명래 선생의 민간요법이 더해져 이명래 고약이 나온 거지.” 임 원장은 “이명래 고약의 핵심은 약재보다는 만드는 방법에 있다”고 했다. 특히 성한 살은 다치지 않으면서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는 소나무 뿌리를 태워 나오는 기름(송근유·松根油)에다 약재를 녹여 만든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은 고름을 빨아낸다.


“고약은 잘 발라지면서도 끈적끈적하게 눌러 붙지 않아야 하는데, 물에 떨어뜨렸을 때 구슬처럼 굳어지는(滴水成珠) 정도가 돼야 해. 그러니 약을 태우고 녹여 다시 굳히는 온도가 관건이지.” 고약의 차진 정도를 맞추기 위해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별로 약을 달리 만든다는 임 원장은 불을 쓰는 도공과 비슷한 심정이 된다고 했다. 아직도 10통을 만들면 2∼3통은 버려야 하는 경우도 많단다.

 

이명래 고약의 계보는 이씨가 사망한 뒤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씨의 막내딸 이용재(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 박사의 아내)씨가 1956년에 세운 명래제약에서는 대량 생산한 이명래고약으로 한때 제약업계를 주름잡았지만 2002년 끝내 도산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약국에서 이명래 고약을 살 수 없게 됐다.


반면, 명래 한의원은 이씨의 둘째 사위 이광진씨가 뒤를 이었고, 다시 그의 사위인 임 원장이 전통방식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보약이 마치 한의학의 전부인 것 같은 현실이 안타깝다”는 임 원장은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젊은이를 찾고 있다.


젊은 한의사들이나 한의대에서, 심지어 미국 유명 의학연구소에서도 제의가 들어오지만 임 원장은 돈 벌 욕심이라면 극구 사양이다. 어설픈 현대화가 엉터리 고약만 남기고 진짜를 사라지게 만들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임 원장은 이명래 선생이 남긴 고약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방을 전할 이가 없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자식이라고 마음대로 되나….” 건축에 재능을 보인 그의 두 아들은 모두 그 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일보 이지혜 기자 입력 : 200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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